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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당공(三省堂公) 진사(進士) 현(昡)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3-09-13조회수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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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당공(三省堂公) 진사(進士) ()

                   임진왜란(壬辰倭亂) 의병장(義兵將)

 

 임진왜란(壬辰倭亂) 의병장(義兵將) 삼성당공(三省堂公) ()은 영월엄문(寧越嚴門)의 시조(始祖) 내성군(奈城君) 엄임의(嚴林義)로부터 16()이시다. 시조공으로부터 5() 복야공(僕射公) ()11대조, 11()인 총제공(摠制公) 유온(有溫)5대조, 13()인 사직공(司直公) 산수(山壽)가 증조부이시다. 사직공(司直公)의 장자(長子)인 훈()이 조부며, ()의 삼자(三子)15() 용공(用恭)은 부()이시다. ()는 진사(進士) ()의 따님이신 풍양 조()씨다.

1542(中宗37)에 태어나 1592(宣祖25)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52()이시다. () 형도(亨道), () 삼성당(三省堂公)이시다.

5대조인 총제공(摠制公) 유온(有溫)은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총제부(都摠制府) 동지총제(同知摠制)를 지내셨다.

총제공(摠制公) 유온(有溫)의 장손(長孫)인 사직공(司直公) 산수(山壽)는 그 둘째 따님이 성종(成宗)의 귀인(貴人)이 되셨는데, 연산군(燕山君)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때 간신 임사홍(任士洪)이 연산(燕山)의 생모 윤씨(尹氏)가 폐비된 것이 엄귀인(嚴貴人)의 모함 때문이었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사직공(司直公) 산수(山壽)와 윤필상(尹弼商) 12 대신이 참형을 당하는 끔직한 비극을 당하셨다.

사직공(司直公)의 장자(長子)14() 통훈대부선공감(通訓大夫繕工監) ()은 이천(利川)에 피거(避居)하다가 돌아가셨다.

() 생원(生員) 용공(用恭)은 그 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 중종14)의 화()를 입어 이를 피해 홀로 이천(利川)을 떠나 낙남(落南)하신 기묘유현(己卯儒賢:기묘사화 피해를 크게 당한 선비)이시다.

갑자사화(甲子士禍)와 기묘사화(己卯士禍), 연속 두 번에 걸친 사화(士禍)의 참화로 가세는 비록 어려워졌으나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는 가풍 속에서 어머니의 정성어린 훈도(薰陶)를 받고 자란 현()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강건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무예 익히기에도 열심이셨다.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진사(進士)가 되시고, 계속하여 학문과 무예에 열중하여 사직에 크게 봉사할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관군의 병력만으로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지에서 의병이 분기함에, 삼성당공(三省堂公) ()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장자(長子) (), 차자(次子) (), 맏손자(冑孫) 귀선(貴善), 차손자(次孫) 종식(宗植)을 데리고 전투가 치열한 호남으로 가시며 충의심으로 격문을 띄우니 의병 수천 명이 따랐다.

삼성당공(三省堂公) ()은 항상 싸움의 선봉에 나서 전투마다 그 전과가 혁혁하셨다. 도주하는 왜적을 쫓아 해남(海南)에 이르러 대진(對陣)하게 되었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이어서 보급이 여의치 못하고 의병과 마필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부득이 퇴진, 전열을 다시 정비하시고, 11월 초닷새 날, 야간공격을 펼치셔 용전분투(勇戰奮鬪)하시다 순절(殉節)하셨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승전에 더 크게 기여하실 기회를 너무 일찍이 마감하셨으니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수행하던 자손과 의병들이 울며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하여 고향인 이천(利川)으로 운구(運柩)하던 중, 영암(靈巖) 월출산(月出山) 아래 누리재(累里峙)에 당도하니 일기불순(日氣不順)하고 모두가 기진하여 더 나가기 어려워지자 월출산(月出山) 자락에 봉분(封墳)을 만들어 안장(安葬)하였다현재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성전면(城田面) 월남리(月南里) 1번지). 자손들은 이천(利川)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성당공(三省堂公) ()의 묘지에서 멀지 않은 도강현(道江縣) 지하리趾下里 : 현재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 병영면(兵營面) 하고리(下古里)에 자리를 잡아 입향조(入鄕祖)가 되어 마을을 이루고 삼성당공(三省堂公)의 시제를 모셔 온다.

자손이 차차 번성함과 시류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인근의 영암, 장흥, 해남, 진도, 나주, 목포, 여수, 서울, 경기 포천, 강원 삼척 등 전국 각지는 물론 외국에도 정착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계, 교육계, 관계, 군계, 경찰계, 금융계, 언론계, 기술계, 의료계, 실업계, 예술계, 체육계 등 각계에서 삼성당공(三省堂公) 후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삼성당공(三省堂公) 묘역(墓域)에는 삼성당공(三省堂公)과 배() 의인(宜人) 분성(盆城) ()씨의 쌍분(雙墳), () 기묘유현(己卯儒賢) 생원(生員) 용공(用恭)과 모() 풍양(豊穰) ()씨 합장(合葬), 장자(長子) ()과 배() 순천(順天) ()씨 합장(合葬)묘가 모셔져 있다.

 

                                                                 <삼성당공 비문>

 

               三省堂公進士諱昡府君墓碣文

 

公諱昡字亨道號三省堂中廟壬寅生我寧越嚴氏自鼻祖麗祖戶部員外郞諱林義曆尙書左僕射諱光之十二世孫諱溫入本朝嘉善左軍同知摠制是生諱克仁早世司直諱山壽有女爲宣陵貴人喬洞被禍中廟反正伸寃贈工曹參議公基曾祖也祖諱訓繕工監奉事三子諱用恭己卯儒賢豊穰趙彭外祖也生二男長伯次子佑世居利川文武修學中司馬試及穆陵龍蛇之訌時年五十有二矣于湖南公檄散文募同志起義應者數千自爲先鋒激戰數月斬獲甚多敵乘夜伴遁逐至海南時則寒天雪滑兵馬凍餓勢已危矣率壯士挺身突擊矢盡力窮而殉節十一月五日夜長子佰次子佑冑孫貴善與從弟宗植泣收藏于累里峙負癸原配宜人盆城金氏坤德鄕範浚公二十三年丙辰三月一日卒墓同原節餘泉臺之靈褒無朝家之曲子孫抱恨曾孫哲福泰福仲信玄孫重大夢奇再逸俱有雲仍不可盡錄有古碣風磨雨衰故僉宗鳩財改此槿刻主是力者環永柱萬柱源

                                                                

                                                                          古碣有司 樂 永

                                        丁未 西紀 一九六七年 二月 日

                                                      十一世孫 贊 永 謹撰

                                                      有司 十二世孫 柱 福

 

                 삼성당공진사휘현부군묘갈문

공휘현자형도호삼성당중묘임인생아영월엄씨자비조려조호부원외랑휘임의역상서좌복야휘광지십이세손휘유온입조가선좌군동지통제시생휘극인조세사직휘산수유여위선릉귀인교동피화중묘반정신원증공조참의공기증조야조휘훈선공감봉사삼자휘용공기묘유현풍양조팽외조야생이남장백차우세거이천문무수학중사마시급목릉용사지홍시년오십유이의우호남공격산문모동지기의응자수천자위선봉격전수월참획심다적승야반둔추지해남시즉한천설활병마동아세이위의솔장사정신돌격시진역궁이순절십일월오일야장자백차자우주손귀선여종제종식읍수장우누리치부계원배의인분성김씨곤덕향범준공이십삼년병진삼월일일졸묘동원절여천대지영 포무조가지전자손포한증손철복태복중신현손중대몽기재일구유운잉불가진록유고갈풍마우쇠고첨종구재개차근각주시력자환영주만주원

 

                                                              고갈유사 낙 영

                                     정미 서기일구육칠년 이월 일

                                                          십일세손 찬 영 근찬

                                                          유사 십이세손 주 복

 

               삼성당공 진사 현 어르신 비석에 새겨진 글

 

삼성당공 어르신의 본 이름은 <>이시고, 다른 이름은 <형도>이시며, 호는 <삼성당>이시다. 중종 임인년에 태어 나셨다.

우리 영월엄씨의 시조이신 <임의>는 고려조에서 호부외랑을 지내셨고, 그 후손으로 상서 벼슬을 지내신 좌복야 <>12세손(세수 계산 착오다. 시조공 <임의>로부터 11이고, 복야공 <>으로부터는 6대손이 옳다.)<유온>이 조선조에 들어서 가선좌군동지총제를 역임하셨다. 아드님으로 <극인>을 두셨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증조할아버지 <산수>는 사직 벼슬을 하셨는데 딸이 있어 성종의 귀인이 되었지만 연산군 말년에 화(갑자사화 때 참형)를 당하였다가 중종반정으로 억울함이 풀려 공조참의를 추증 받았다. 할아버지 <>은 선공봉사 벼슬을 지내셨고, <>의 셋째 아들 <용공>이 아버지이며 풍양 조씨 <>이 외할아버지시다. 아버지 <용공>은 기묘유현(기묘사화 때 화를 크게 입은 선비)이시다.

큰아드님 <>과 둘째 아드님 <>, 두 아들을 낳으시고 이천에서 사시면서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익혀서 사마시에 합격하셨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때 나이 52세였다. 호남으로 내려가며 격문을 띠워 나라의 위급을 구할 뜻을 같이 하고자 하는 의병을 모으니 따르는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

스스로 선봉이 되어 여러 달 동안 격전을 벌였는데 왜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숫자가 대단히 많았다. 왜적이 밤을 틈타 달아나자 쫓아가 마침내 다다른 곳이 해남이었다. 그런데 때는 한겨울이라 추운 가운데 눈은 내려 미끄러워 보급이 여의치 못하니 병사와 말은 추위에 얼고 굶주려서 형세가 매우 위급해졌다. 이에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몸을 사리지 않고 돌격하였는데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순절하셨다. 115일이었다.

맏손자 귀선과 그 사촌동생 종식이 울며 시신을 거두어 누리치 남쪽 언덕에 모셨다.

부인은 의인(조선조 정종6품 문무관 아내에게 내린 호칭) 분성 김씨로 성품과 지니신 덕이 고을의 본보기가 되셨다. 공이 서거하신지 23년 뒤인 병인년 31일에 생을 마감하셨다.

묘는 월출산 남쪽 자락인 월남리 산 1번지다.

공의 충절심은 하늘나라의 혼백으로 남아 있으나 조정의 포상이 없었던 일에 대해 자손들이 섭섭해 하는 마음은 풀 길이 없어서, 그 안타까운 마음을 증손자 <철복> <태복> <중신>, 현손자 <중대> <몽기> <재일>이 힘을 합쳐 공의 충절심을 기리어 그 한을 달래고, 후손들이 이 비석에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옴을 알리고자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그 옛 비석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에 마모되고 훼손되어 종친들이 다시 힘을 모아 이 비석을 삼가 새겨 세우게 되었다. 특히 <환영> <주만> <주원>이 이번 새 비석을 세우는 일에 많은 힘을 썼다.

 

                                                                  고갈(옛 비석) 유사 낙 영

                                             정미 서기일구육칠년 이월 일

                                                                   십일세손 찬 영 근찬

                             (<찬영>은 삼성당공으로부터 11세다. <>자를 붙이면 10대손이 옳다.)

                                           유사 십이세손(11대손이 옳다.) 주 복

                            (시조공 이십칠세, 삼성당공 11대손 주 삼 삼가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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