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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를 읽다가 엄항섭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위의 홈페이지 소개 내용을 다시 소개합니다.
일제가 김구 주석에게 내건 현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일제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자칫 현상금에 눈이 어두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엄항섭 선생을 비롯한 최측근뿐이었다. 엄항섭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주석 판공실 비서로도 활약하고 있었지만,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실무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임시정부를 위한 일에 선생이 관계되지 않은 일들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임시정부는 위기 때마다 선생의 실천력으로 고비를 넘겼다. | |
3·1 만세운동 보고 독립운동의 길 가기로 결심하고 상해로 망명
엄항섭(嚴恒燮, 1898.10.15(음력 9.1)~1962.7.30) 선생은 1898년 9월 1일 승지를 지낸 엄주완(嚴柱完)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이다. 본관은 영월이고, 일명 예빗 엄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일파(一波)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고, 필명으로 대위(大衛)를 사용한 적도 있다. 선생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선생은 1919년에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보성법률상업학교는 보성전문학교의 옛 이름으로,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선생이 보성법률상업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민이 일어나 조국의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것을 보면서, 선생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세워져 있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선생은 거기서 김구를 만났고,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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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내각도 없는 임시정부…돈 없는 임시정부…선생이 받은 월급 임정에 보내줘
선생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9년 9월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출범한 상태였다. 3・1운동 직후 노령·상해·한성에서 수립되었던 세 곳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실현하고, 1919년 9월 11일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통합정부를 구성하였을 때, 선생은 법무부의 참사가 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오래 있지 않았다. 당시 선생의 나이 22살이었다. 상해로 찾아온 청년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선생 역시 학업을 계속하고자 하였다. 선생이 입학한 곳은 항주에 있는 지강(芝江)대학이었다. 선생은 지강대학에서 중국어·영어·불어 등 어학을 공부하였다. 어학을 공부한 것이 후일 그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데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1922년 지강대학을 졸업한 후, 선생은 상해로 돌아왔다. 그동안 상해의 임시정부는 크게 변해 있었다. 수립 초기 국내외에서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상해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떠났다. 그리고 각원들도 대부분 사퇴하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젊은 청년들 역시 임시정부에서 멀어져 갔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김구와 이동녕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사람만 떠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워졌다. 수립 초기에는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와 함께 독립자금도 적지 않게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이 떠나면서 자금도 함께 줄어들었고, 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김구·이동녕 등의 인사들조차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 곤궁은 극심한 형편이었다.
선생은 임시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편으로 선생은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였다. 자신이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또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을 체포하려는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의 사정을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엄항섭군은 유지청년으로 지강대학 중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주는 것이었다.
선생뿐만 아니라 선생의 부인도 요인들을 극진히 모셨다. 김구는 “내가 자기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문 밖까지 따라 나와 전송하며 은전 한두개씩을 내 손에 쥐어주며 아기 사탕이나 사주세요”라며, 부인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상해에서 숨진 그 부인의 무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며, 무덤에 묘비를 세워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했다.
요인들의 생활만이 아니라, 이들 요인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도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상해의 일본영사관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을 체포하려면 사전에 불란서 조계 당국과 교섭하여 양해를 얻어야 했다. 선생이 불란서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이러한 정보들을 입수하여 미리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역할을 감안하면, 선생은 임시정부를 지켜낸 인물, 즉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란 표현이 적절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천문학적인 현상금 걸린 김구가 측근 중의 측근으로 믿고, 일을 맡긴 엄항섭 선생
선생은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줄곧 김구와 함께 활동하였다. 자신의 활동이나 역할이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구가 활동하는 곳에는 거의 선생이 있었다. 김구와는 스물두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선생은 김구를 선생님처럼 모시고, 그의 활동을 뒤에서 도운 것이다. 박찬익(朴贊翊)·안공근(安恭根)과 같은 인물들이 측근으로 김구를 보좌한 일이 있었고, 선생도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926년 12월 김구는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킬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방안의 하나가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선생은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이 일에 관여하였다. 헌법개정기초위원이 되어 그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 법무부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었고, 김구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할 수 있는 인물이 선생이었다. 헌법의 개정은 대통령·국무령과 같은 단일지도체제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었고,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1927년 4월 11일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약헌’이 바로 그 헌법이었다.
김구가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정책’을 할 때도, 선생이 그것을 도왔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김구가 직접 썼지만, 영어를 할 줄 몰랐던 김구는 겉봉에 주소를 쓸 수 없었다. 김구 옆에서 이 일을 한 것이 안공근과 선생이었다.
김구가 작성하여 발표하는 각종 글을 번역하는 것도 선생의 몫이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주도하였던 김구는 두 사람의 의거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 하나로 김구는 이봉창이 사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봉창이란 인물의 행적과 그가 결행한 일황저격의거의 경과와 사실을 「동경작안지진상(東京炸案之眞相)」이란 제목으로 작성하였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이 글을 선생이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이 글은 중국의 《신강일보(申江日報)》와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진동전세계 동경작안지진상(震動全世界 東京炸案之眞相)」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 |
엄항섭 선생과 부인 연미당의 결혼식(1927). 선생의 결혼식에 참석한 김구·안창호·이동녕·이시영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이 보인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4, 2011) |
김구가 가흥(嘉興)으로 피신해 있을 때도 그 곁에는 선생이 있었다. 이봉창·윤봉길의 의거 이후 일제는 60만원이라는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김구는 일단 상해에 있는 미국인 피치 박사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선생은 박찬익·안공근 등과 함께 김구가 안전하게 피신할 곳을 찾았다. 중국측과 교섭하여 가흥에 있는 저보성(楮輔成)의 집을 피신처로 마련하였고, 선생은 이동녕 선생과 김의한 가족들과 함께 먼저 그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김구를 모셔왔다. 당시 일제가 내건 현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일제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자칫 현상금에 눈이 어두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최측근뿐이었다.
선생은 김구가 장개석을 만나러 갈 때도 수행하였다. 중국측은 김구가 주도한 이봉창·윤봉길의 의거에 대해 크게 감격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김구와 장개석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1933년 봄 남경에서 이루어진 이 면담에 선생은 박찬익·안공근과 함께 김구를 수행하였다. 이 면담에서 중국측이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고, 한인청년들을 낙양군관학교에서 훈련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몇 가지 예에서와 같이 선생은 상해에서 김구를 만난 이래 그가 서거하던 순간까지 김구를 보좌하며 활동하였다. 때로는 김구의 명의로 발표된 각종 선언문이나 글들을 번역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고, 대필을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해방 후 국내에 돌아와 김구가 쓴 중문으로 된 『도왜실기(屠倭實記)』를 번역하여 간행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그리고 항상 최측근으로 김구의 곁에 머물며 그를 보좌하며 참모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청년단, 한국청년전위단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단단하게 옹호
선생은 1930년대에 들어와 정당을 결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전선에서 정당을 결성하자는 논의는 임시정부 수립 당시부터 제기되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정부라는 조직체보다는 정당이 효율적이라는 의견이었다. 이후 1920년대 중반부터 전민족이 대단결하여 민족의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민족유일당은 결성되지 못하였지만, 그 여파로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정당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생이 정당 결성에 참여한 것은 한국독립당이었다. 1929년 말 민족유일당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이 정당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 방향은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기초세력으로 삼아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정당의 추진은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급진전되었고, 1930년 1월 김구·이동녕·안창호·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기반이 마련되었다. 한국독립당은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한 정치적 조직이었지만, 동시에 임시정부의 전위조직이자 기초세력으로 역할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를 기초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하나가 의열투쟁이었다. 이를 위해 김구를 책임자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한인애국단 주도하에 각종 의열투쟁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갔다. 특히 이봉창 ・ 윤봉길의 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일대 전기를 가져온 쾌거였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그동안의 침체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생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우선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 각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윤봉길의 의거 직후 일제 경찰이 불란서 조계를 급습하면서 임시정부는 근거지였던 상해를 떠나 항주로 옮겨갔다. 그리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안창호는 피체되었고, 주요 요인들은 항주·가흥·남경 등지로 피신한 것이다. 선생은 김구의 측근들과 함께 가흥에 있었다.
또 여러 정당들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면서, 임시정부가 무정부상태를 맞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많은 정당들이 결성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일전선을 통일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통일운동은 여러 정당이 통일하여 단일신당을 결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통일운동에 임시정부의 기초세력인 한국독립당의 주요 인사들도 참여하였고, 마침내 1935년 7월 의열단·신한혁명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이 통일을 이루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한국독립당은 해체되었다. 그리고 국무위원 7명 중 송병조 ・ 차리석을 제외한 5명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를 맞게 된 것이다. | |
한국국민당의 선전 기관지 《한민(韓民)》(1943). 《한민》을 통해 엄항섭 선생은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도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고자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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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통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폐지를 전제로 하였던 때문이었다. 선생은 임시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존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무정부상태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 방안의 하나는 국무위원을 선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5년 10월 가흥에서 제28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하였다. 일제의 정보 보고에는 제28차 의회가 선생의 집에서 개최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회의에서 민족혁명당에 참가한 국무위원 5명에 대신한 보선을 실시, 김구·이동녕·이시영·조성환·조완구를 새로 선임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가 수습되었다.
다른 하나는 임시정부의 세력기반이 될 정당을 창당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김구·이동녕과 함께 이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 방법으로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한국독립당 세력을 결집하였다. 김붕준·양명진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 광동지부는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1935년 11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선생은 이사 7인 중 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선전부장을 맡았다. 국무위원을 보선하여 무정부상태를 수습하고, 한국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일단 임시정부는 유지될 수 있는 조직과 세력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선생은 한국국민당의 세력을 확대해가면서,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해 갔다. 선생이 추진한 방법은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구 주위에는 낙양군관학교 출신들을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청년단·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의 외곽단체이자 전위조직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민(韓民)』․『한청(韓靑)』등의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도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고자 한 것이다. | |
선생이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고 있을 때, 독립운동전선에 또다시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이 좌우익의 정당과 단체를 통일하자는 데 합의한 것이다. 이에 의해 그 해 8월 기강에서 좌우익의 7개 정당과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좌우익 사이의 이념적인 차이와 독립운동 최고기구를 임시정부로 할 것이냐 통일된 단일신당으로 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결렬되고 말았다.
좌우익진영의 통일운동이 결렬된 후, 우익진영 3당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3당이란 한국국민당을 비롯하여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던 조소앙이 탈퇴하여 재건한 한국독립당, 이청천 등 만주세력이 중심이 된 조선혁명당을 말한다. 이들 3당은 임시정부의 옹호를 전제로 통합하기로 하고, 1939년 10월부터 통합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선생은 한국국민당 대표로 통합회의에 참여하였고, 결국 1940년 5월 8일 3당이 통합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를 중경에서 결성되었다고 하여, 중경 한국독립당이라 일컫는다.
한국독립당의 창당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계기로 분파되었던 민족주의 세력이 총결집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임시정부로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세력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은 김구가 선임되었고, 선생은 홍진·조소앙·조시원·이청천·김학규·유동열·안훈·송병조·김붕준·양명진·조성환·차리석·이복원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선생은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 |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김구 선생(앞줄 왼쪽 다섯번째)과 임정 요인들이 환국을 앞둔 1945년 11월 3일 촬영한 사진. 김구 선생 왼편이 엄항섭선생(앞줄 왼쪽에서 네번째)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4, 2011) |
임정 광복군 창설하자, 선생은 미주 신문 통해 광복군 소식 알려 자금 확보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경에 정착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나 항주로 옮겼던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지로 이동해 다니다가 중경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중경은 중국국민당 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한 곳이었다.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체제로 정비되었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여 추진한 첫 사업은 한국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군대를 편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중경에 정착하면서 이를 추진한 것이다. 그 방법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과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청년들을 기반으로 우선 총사령부를 성립하는 것으로 추진되었고,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선생은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성립전례식은 중경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가릉빈관에서 개최되었고, 당시 중경에 있는 외국사절들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의 인사들과 중국군 관계자 등 2백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행사는 일본공군기의 공습을 피해 아침 7시부터 3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이 행사의 제반 준비와 실무를 선생이 맡아 한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활동을 미주교포들에게 알리는 일을 맡아 한 것도 선생이었다. 당시 임시정부가 해결해야 했던 주요한 과제의 하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중국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랐다. 광복군을 창설하였지만, 그 대원들의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하였고, 그것을 미주교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재정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임시정부가 어떠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는지를 알려야 했다. 선생이 그 일을 맡았다. 선생은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배관기(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拜觀記)」·「광복군에 관한 보고」·「대한철혈남아 사방에서 운집」등의 글을 작성하여,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선생이 보내는 글들은 대부분 미주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선생은 《신한민보》의 통신원 역할을 하였고, 《신한민보》는 ‘임시정부 소식’난을 마련하여 이를 미주교포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었다. 선생의 이름을 표면에 나타내지도 않았다.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주석 판공실 비서로도 활약하고 있었지만,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실무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임시정부를 위한 일에 선생이 관계되지 않은 일들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선생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의 실무적인 일들을 맡아서 수행하고 있었던, 임시정부의 젊은 일꾼이었다.
선생이 대외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낸 것은 임시정부의 선전부장이었다. 1944년 임시정부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었다. 좌익진영이 참여하여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좌익진영은 1942년 그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합편하고, 10월에는 의정원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4년 4월에는 정부에도 참여함으로써,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좌우연합정부가 구성되면서 정부의 조직도 확대 개편하였다.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김구와 김규식을 주석・부주석으로 선임하였고, 종전의 내무·외무·군무·법무·재무의 5부에서 문화부와 선전부를 증설한 것이다. 이때 선생이 선전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김구 선생 비통하게 떠나 보내고, 6·25 전쟁 도중 납북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였다. 그 뒤 국내에서도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는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도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선생은 이를 반대하며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통일된 정부수립을 갈망하였지만,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이 분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선생님처럼 모시던 김구가 동족의 흉탄에 서거하면서 희망도 없어져 버렸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었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선생이 김구의 영전에 바친 추모사 중에서(1949. 6)-
민족의 분단은 전쟁을 불러왔고, 선생은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통일을 위해 진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962년 7월 30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