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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日獨立運動의 인물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1-12-23조회수2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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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日獨立運動

 

 * 항섭공(恒燮公)

 28世孫 恒燮公은 1898年(高宗光武2年)경기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90번지에서 承旨를 지내신 柱完公의 아드님으로 구한말 農商工大臣을 지내신 世永公의 둘째 손자로 普成專門學校 商科를 졸업하고 3.1獨立萬歲運動에 가담하였다가 9月에 상해로 亡命하여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部參事가 되고 議政院議員으로 활동, 1924年 上海韓人靑年同盟 發起人 執行委員, 財政部長 臨時政府後援會委員, 臨時政府議政院에 췽미하여 白凡선생을 보좌하여 獨立黨宣傳部長, 1949年 金九선생이 피살 될 때까지 그를 보좌하다가 북한의6.25남침으로 拉北되셨으며 1956年 南北平和統一促進會議의 常任委員 겸 執行委員을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大韓民國政府는 1989年 3月1日 獨立鬪爭功勞를 인정하여 建國勳章 國民章을 追敍하였습니다.(생사불명)

 

 * 창섭공(昌燮公)

28世孫 昌燮公은 1891年 (高宗28年)전북 익산 능포면에서 태어나 新學問을 修學하고 私立 昌永學校 교사로 재직 당시 3.1運動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3월6일과 7일 재직중인 교사 高相俊, 秋炳甲 등과 함께 강경 장날을 기하여 萬歲示威運動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먼저 太極旗 2백여개를 제작하여 강경읍 주민들에게 나뉘어 주며 萬歲示威運動에 참여 할 것을 勸誘하였습니다. 그곳 높은 산 옥녀봉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장날에 모여든 군중들 앞장에 나서 獨立萬歲示威를 주도하다가 日警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습니다. 출옥후 民族思想啓蒙隊를 조직하고 그 隊長으로서 군산 만경 강계 등을 순회하며 抗日民族精神을 고취하다가 다시 日警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서울에서 1927年 抗日民族主義者들의 統合團體인 新幹會(朝鮮日報 社長 李商在)가 조직되자 1929年에 그 宣傳隊員으로 활동하다가 세 번째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었으며, 1973年 12月 5日 서거하였으며, 大韓民國政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大統領表彰을 추서하고 1990年에 다시 建國勳章愛族章을 추서하였다.

 

 * 송여공(松汝公)

28世孫 松汝公은 경기 개풍군 동여 출생으로 아버님 慶九公의 장남으로 태어나 開城第二公立普通學校를 다니다가 1929年 光州學生運動이 발생하자 開城西部市街地에서 示威하다가 日警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不穩學生으로 日警의 要視察대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臨政要人의 안내로 金九主席을 찾아가 抗日鬪爭길에 나셨습니다. 南京에 있는 韓國愛國團에 가입하여 政治敎育을 받으 s다음 國內에 潛入하여 愛國學生 糾合과 各種情報蒐集에 임하라는 秘密指令을 받고 入國하였습니다. 그러나 日警의 감시망에 걸려 京畿道警察局으로 이첩되어 二年形의 옥고를 치렸습니다.

광복후 陸軍士官學校 3期 特班에 入校한 다음 陸軍少尉로 任官, 그후 16聯隊長으로 복무중 6.25를 당하여 陸軍第二司令部 兵務部長으로 除隊하였습니다. 大韓民國政府는 1977年에 建國功勞勳章 愛國章을 追敍하였습니다.

 

 * 대성공(大成公)

大成公은 1899年 11月11日 黃海道 해주에서 태어나 20歲 당시 3.1獨立萬歲運動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3月12日 普通學校學生 徐炳夏, 趙仁信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가담하다가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지역1年6月을 선고 받고 本人은 「本來 朝鮮 사람으로서 萬國平和會議에서 他國의 屬領은 모두 解放된다는 民族自決論을 듣고 萬歲를 불렸는데 무슨 罪가 될 것인가. 이에 모든 處刑을 一切不服한다 」고 上告하였습니다. 그러나 理由없다고 1年6月形을 확정하고 옥고를 치렸습니다.

출옥후 滿洲間道龍井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후 中國에서 활동하다가 서거하여 정부에서는 1986年 대통령표창과 1990年에 다시 建國勳章愛族章을 추서하였다.

 

 * 창수공(昌樹公)

 昌樹公은 1923年 忠淸南道 금산에서 태어나 평소 排日思想이 강한 公은 1940年 5月11日 금산읍의 각종업소에 근무하는 18歲이하의 靑少年同志 7名과 친목을 위장한 抗日結社인 市場親友會를 조직하고 이해 7月에 進樂同志會로 개칭한 후 본격적인 抗日鬪爭을 전개하였습니다.

1940年에는 文大植 등 3名과 더불어 금산군 남 2면의 관광명소인 진락산동굴 바위에 페인트로 대형 태극기를 그리고 『朝鮮獨立萬歲』라고 조각된 木塔을 건립하여 抗日民族鬪爭을 고취시켰습니다.

이일이 탄로나 公은 1941年 2月17日 日警에 체포되어 1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祖國解放의 기쁨을 보시고 1968年 서거하셨으며, 정부에서는 1980年 대통령표창과 1990年에 다시 建國勳章愛族章을 추서하였다

 

* 주태공(柱泰公)

27世孫 柱泰公은 1900年(高宗光武4年)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919年 3.1運動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양산읍내에서 金秉健 등 血盟을 다지고 극비리에 獨立宣言書를 다량으로 등사하고 太極旗 三千여장을 준비한뒤 3月27日 양산장날을 택하여 數千名이 雲集한 群衆을 이끌고 獨立萬歲를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日本憲兵들이 총탄을 난사하여 群衆을 해산시키고 柱泰公 등 主謀者들이 체포되어 釜山地方法院을 거쳐 大邱陪審法院에서 2年6月 形을 선고 받고 獄苦를 치렸으며, 出獄後에도 故鄕에 靑年會를 조직하여 愛國思想을 고취하다가 고문 휴유증으로 서거하였다.

大韓民國政府는 1989年에 建國功勞勳章 愛國章을 追敍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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