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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中期의 人物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2-06-13조회수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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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中期의 人物

 

* 흔공(昕公)

16世孫 諱 昕公은 1808年(中宗3年)에 保功將軍忠佐衛를 지낸 아버님 諱 用和公과 僉正諱 仲誠公의 따님이신 어머님 淑人 安東金氏외의 사이에 나셨습니다. 字는 啓昭 號는 十省堂

昕公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文才에 뛰어나 일찍이 經書에 통달하고 科擧의 글을 익혀 1525年(中宗20年)18歲때 司馬試(生員)에 합격하고 1528年(中宗23年) 21세때 式年文科에 甲科로 壯元及第하셨습니다.

昕公은 이해 8月 弘文館(別科玉堂)의 正字에 임명되고 그때 새로 설치된 湖堂(讀書堂)에 뽑혀 經學을 연수하며 官道의 길을 읽혔습니다. 같은해 十月 著作을 거쳐 다음해 1529年(中宗24年)四月 博士에 임명되시고 5月에 王世子(후일 仁宗임금)에게 經書와 道義를 가르치는 世子侍講院(別科春坊)의 設書에 除授되는 등 中宗임금의 특별하신 寵愛를 받으셨습니다.

氣銳出衆한 昕公은 昇進을 거듭하여 1530年(中宗25年)에 弘文館의 修撰이 되시고 이해 5月에 政事의 옳고 그름을 王께 進達하는 司諫院의 正言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中宗反正으로 暴君 燕山君을 逐出하고 寶位에 오른 中宗朝는 世祖와 燕山君때의 勳舊派와 새로 登用된 新進士林간의 黨爭이 치열하고 士禍도 많아서 이때 昕公의 前程에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昕公은 諫官이 된지 얼마 못되어 大司憲 金謹思 大司諫 沈彦光 正言 김미등과 더불어 「灼鼠(작서)의 變」의 元兇 김헌윤, 김극필, 김광개 등 三奸을 처벌하라는 上疏를 올려 彈劾하였습니다.

「灼鼠(작서)의 變」이란 1517年 (中宗23年)에 중종임금의 사위이며 金安老의 아들인 연성위 金禧가 그 아비를 탄핵하여 豊德에 流配시킨 大諫沈貞과 柳子光등에게 원한을 품고 이들을 除去하려는 金安老의 使嗾를 받고 쥐를 태워 東宮(世子)生日날 뜰에 내걸고 저주하였던 사건을 말합니다. 이 事件으로 敬嬪朴氏와 그 아들 福成君媚가 廢庶人되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昕公은 金安老가 賜死된 다음해인 1538年(中宗33年)2月 領議政 윤운보, 左議政 홍언필, 우찬성 소세양 등의 주청으로 官職을 박탈 당한지 7年만에 弘文館의 副修撰으로 복직되었습니다. 복직된 昕公은 昇進을 거듭하여 이해 10月 侍講官(正四品)이 되시고 郡制를 改善하였으며 百姓들의 進上品인 生鮮, 生雉(산꿩)등의 獻納改善을 進言하여 民弊를 해소하였습니다.

1541年(中宗36年)6月 昕公은 弘文館의 典翰(從三品)에 오르고 大臣이 大諫을 함부로 홀대한다고 彈劾하여 是正된 바도 있습니다.

그런데 典翰이 되신 昕公은 오랫동안 병석에 있다가 다음해 1542年(中宗37年) 3月28日 出仕한지 5年만에 官職을 辭任하였습니다.

昕公은 1年여동안 치료하다가 1543年(中宗38年)9月9日 36歲의 壯年으로 逝去하였습니다.

 

* 홍공(泓公)

16世孫 諱 泓公은 1527年(中宗22年)에 宣務郞이신 아버님 諱漢朋公과 監種 諱德恩公의 따님이신 宣人全州李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字는 伯深. 泓公은 17歲에 進士되시고 여러 地方官職을 거쳐 文川郡守 玄風郡守 赤誠縣監 등을 歷任하셨습니다. 1592年(宣祖25年)에 壬辰倭亂이 발생하여 全國이 유린당하고 宣祖大王이 義州로 蒙塵하실 때 65歲의 고령을 무릅쓰고 慶尙道招諭使 金誠一의 지시에 따라 本郡의 義兵將이 되시고 곽찬을 召募官으로 삼아 義兵을 모집하였습니다.

이때 玄風등지의 유수한 가문들은 모두 洛東江을 건너 가야산이나 덕유산 등지로 피난갔습니다. 그러나 金誠一은 令旨를 내려 全玄風郡守 泓公을 招致하여 本任으로 定하고 檄文을 띄워 官吏와 百姓들을 모집하여 倭軍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事實은 壬辰倭亂때 領議政을 지낸 柳成龍의 試問이 실린 西厓集과 肅宗때 사람 이재형의 詩文集인 松岩目錄에 실려 있습니다. 配位令人 昌寧曺氏는 諱忠順公의 따님이시며 工曹參議인 長子風一과 次子有悅을 남기셨습니다.

 

* 현공(昡公)

16世孫 諱昡公은 1542年(中宗37年)에 경기도 이천에서 生員이신 아버님 諱用恭公과 進士인 諱彭公의 따님이신 어머님 豊穰趙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字는 亨道, 號는 三省堂.

昡公은 이천에서 學問과 武術을 연마하던중 1592年(宣祖25年)4月 壬辰倭亂이 발생하여 八道가 倭軍에 유린당하자 두 孫子 貴善과 鍾植을 이끌고 호남방면으로 향하여 나라에 대한 忠義心으로 檄文을 띄워 義兵을 모으니 수백명의 의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昡公이 선봉에 나서 왜병과 접전할적마다 많은 捕虜와 敵兵을 斬首하니 세불리한 적군은 夜半逃走하였습니다. 이때 공께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進擊하여 해남군대리에서 對陣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嚴冬雪寒이어서 補給이 여의치 못하고 義兵과 馬匹들이 굶주림을 견지 못하여 부득이 退陣하여 戰列을 다시 整備하였습니다. 그리고 11月5日 夜間攻擊을 펼쳐 勇戰奮鬪하였으나 화살이 다하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殉節하시니 享年52歲셨습니다.

이때 수행하던 귀선과 종식 두孫子와 義軍들이 公의 屍身을 이천으로 운구하던중 月出山아래 月下里 이르러 日氣不順으로 부득이 더 진행 못하고 山1번지의 右岡에 奉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 道康縣趾下里에 定住하게 되니 入鄕祖가가 되셨습니다.

 

* 인술공(仁述公)

17世孫 諱 仁述公은 1540年(中宗35年)에 中宗때의 著名한 文臣, 學者이신 十省堂 諱昕公과 將士郞 諱 大有公의 따님이신 淑人務安朴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字는 述之.

仁述公은 四才때인 1543年(中宗35年)에 弘文館의 典翰(從三品)이신 昕公께서 逝去하시고 어머님朴氏의 품에서 어렵게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成長過程에 고나한 記錄이나 修學經歷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後日記錄으로 마루어 蔭職으로 官界에 나간듯 합니다.

仁述公은 1599年(宣祖32年)에 안산군수를 지냈는데 그 治積이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601年(宣祖34年)에 정선군수로 임명되었고 2年後인 1603年(宣祖36年)에 강원도 暗行御史 曺倬은 정선군 嚴仁述의 治積이 매우 좋다고 書啓하였습니다.

다음해 1604年 (宣祖37年)에 仁述公은 淮陽道 護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이해 十月 강원도 暗行御史 宋전은 淮陽府使 嚴仁述은 到臨한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百姓을 사랑하는 政事를 우선으로 한다는 稱訟하는 書啓를 임금께 올려 거듭 致賀하였습니다.

얼마 후인 1606年(宣祖39年)二月 司憲府에서 아뢰기를 「淮陽과 鐵原 은 다같이 北路를 往來하는 요충이므로 이 같은 邊方은 어려움이 많을 때 일수록 防備에 관한 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코 옹졸한 蔭官을 이처럼 重要한 자리에 둘수 없습니다. 府使嚴仁述과 洪耆英을 모두 遞職할 것을命하시고 그 代任은 나이 젊고 才略이 있는 武臣中에서 官秩의 高下를 따지지말고 十分 가려서 보내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한다. 그러나 首令들은 반드시 遞職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여 그대로 留任케 하였습니다.

이후의 行蹟은 상세하지 않으나 仁述公은 到任하는 곳마다 善政을 베푼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仁述公은 1606年 (宣祖39年)에 逝去하시니 享年67歲셨습니다. 後日 曾孫緝公과이 貴히 됨에 따라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에 追贈되었습니다.

 

* 유윤공(惟尹公)

17世孫 諱 惟尹公은 1562年(明宗17年)에 경기도 이천에서 贈刑曹判書 諱 暐公과 貞夫人綾城具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字는 元聖 號는 又隱 諡號는 義愍.

惟尹公은 어려서부터 氣骨이 丈大하고 氣像이 늠름하여 非凡하였으며 매우 聰明하고 智力이 出衆하셨다 합니다. 學業에 才質이 뛰어나고 특히 兵書를 탐독하여 六韜三略을 꿰뚫으니 뭇사람들이 장차 큰 人物이 될 것이라고 稱讚하셨습니다.

惟尹公은 1587年(宣祖20年)에 宣略將軍으로 都摠府都事에 推薦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후 1592年(宣祖25年)에 日本이 侵略하는 壬辰倭亂이 發生하여 倭敵이 破竹之勢로 밀려오니 宣祖大王은 서울을 떠나 義州로 播遷하였고 八道는 거의 倭軍에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惟尹公은 아무런 武力準備없이 奮然히 蹶起하여 집안에서 부리던 奴婢八十여명과 檄文은 띄워 모은 義兵 百여명으로 義軍을 조직하고 國家의 興亡이 目前에 닥쳤으니 坐視할 수 없다며 決死抗戰할 것을 다짐하셨습니다.

惟尹公은 義兵을 지휘하여 麗江上流에 布陣하고 險峻한 山谷을 이용하여 神出鬼沒하는 奇襲攻擊으로 英陵 동구에서 倭軍을 맞아 一進一退하며 여러달을 敢鬪하셨습니다. 長期戰이 되며 事勢가 불리해지자 倭軍은 水原方面으로부터 大部隊를 증원 받아 그 氣勢는 자못 沖天하였습니다. 이에 一部 義兵들은 衆寡不敵으로 싸울수 없으니 일단 後退하고 다시 決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惟尹公은 「大盜들이 侵入하여 國家(국가)運(운)命(명)이 危急(위급) 이때 忠義(충의)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하물며 英陵이 있는 이곳을 防禦(방어)하지 못한다면 先王에 대한 面目이 없다」하고 義兵들을 독려하여 영릉동쪽에서 하루종일 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補給이 끊겨 화살이 떨어지고 氣力이 다하여 勢不利하자 투구와 갑옷을 벗어 바위에 걸어놓고 「이 한몸이 죽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죽겠노라. 이미 기울어진 나라와 運命을 같이하여 나도 또한 敵의 더러운 칼에 죽기 전에 깨끗한 강물에 投身하노라」는 말씀을 남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殉國하시니 享年31歲셨습니다. 후일 惟尹公이 殉死한 바위를 「忠義岩」이라 하였으니 後世사람들이 忠義心을 드높이게 하고 있습니다.

惟尹公의 忠義는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五周甲 즉 三百年이 지난 1892年(高宗29년)에 高宗大王이 英陵에 行次하시어 여러 臣下들과 더불어 壬辰倭亂 당시 이곳에서 惟尹公이 殉國하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크게 感銘하시고 惟尹公의 忠義를 가상히 여겨 童蒙敎官을 贈職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1893年 (高宗30年 )에 通政大夫吏曹參議에 追贈하시고 忠臣門의 旌閭와 諡號를 義愍으로 내리셨습니다.

 

* 덕록공(德祿公)

17世孫 諱 德祿公은 1564年(明宗19年)에 贈左承旨이신 아버님 諱 壽永公과 贈淑夫人延安李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字는 明俊 號는 退休堂으로 德祿公은 1592年(宣祖25年)에 司憲府의 監察이셨습니다. 이해 壬辰倭亂을 당하여 宣祖大王은 事態가 危急하자 都城을 떠나 平壤에 避居하였다가 6月 에 다시 義州로 避難길에 올랐습니다. 이때 監察德祿公은 宣祖임금으 f扈從하며 義州로 行次하는 途中에 賊兵을 만나 危急한 상황이 발생하자 달려나가 奮戰한 끝에 賊兵數十首를 베었습니다.

德祿公의 勇戰을 보신 宣祖大王께서는 크게 가상히 여겨 原從功臣등 功勳祿券을 下賜하시고 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正三品. 堂下官)로 특명하셨습니다. 이후 德祿公은 1608年(宣祖41年)에 벼슬을 그만두시고 鄕里인 光州에 낙향하여 文學을 樂으로 삼으시다가 1646年(仁祖24年)에 逝去하셨습니다.

 

* 성공(惺公)

18世孫 諱 惺公은 1575年 (宣祖8年)에 平市直長을 지낸 아버님 諱仁達公과 僉正 諱鎭公의 따님이신 貞夫人靑松沈氏외의 사이에서 長男으로 나셨습니다. 字는 敬甫 號는 桐江.

惺公은 11歲때 어버이를 여의고 篤志로 學業에 힘써 38世되는 1612年(光海君4年)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이해 가을에 增廣試乙科에 及第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惺公의 아우되시는 惶公은 1630年(宣祖36年)에 學業을 포기하고 武科에 及第하여 兄弟분이 官職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惺公과 惶公이 있었던 時代는 壬辰倭亂으로 國土가 荒廢하고 이어서 丙子胡亂이 닥치는 內憂外患으로 어려움이 山積하던 때였습니다. 登科한 해 12月28日 惺公은 世子侍講院의 設書에 임명되고 다음해 2月에 藝文館의 檢閱이 되셨습니다.

光海君은 宣祖의 後宮恭嬪의 둘째 아들로서 世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正宮仁穆大妃가 늦게 의를 出産하자 宣祖大王은 光海君을 싫어하여 永昌大君md로 王位를 계승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일을 눈치챈 李爾瞻 鄭仁弘등이 世子를 바뀌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다가 宣祖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가게 되었습니다. 이럭저럭 귀양길을 미루는 사이에 갑자기 宣祖大王이 昇遐하자 光海君은 당일로 王位에 오르고 李爾瞻등을 다시 登用하였습니다. 登用된 李爾瞻은 禮曹判書와 大提學을 겸임하고 大北派를 登用하여 먼저 逆謀罪로 宣祖의 長子 臨海君를 賜死하고 이어서 仁穆大妃의 아버지 金悌男을 죽이고 14歲된 永昌大君을 庶出하였습니다. 그리고 仁穆大妃도 폐하고자 大北派의 李偉卿, 韓服, 韓晤, 副校理 李昌俊들과 그의 아들 李尙恒등 26人이 逆賊을 토벌하고자 廢母論을 펴고 나셨습니다.

이때 성품이 강직한 嚴惺公은 1613年(光海君5年)7月11日千秋望闕禮에 四館(成均館, 藝文館, 校書館, 承文院)의 館員이 일제히 大闕에 나온 대를 살펴 承文院으로 나아가서 四館員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두려워하여 흩어지고 承文院博士 尹銓, 正字權護등 몇사람과 議論하여 「母后를 動搖시켜 綱常에 罪를 얻었다」라는 八字를 결정하여 李偉卿등을 榜에 걸어 論議하고 儒籍에서 停擧하게 하자 듣는 이들이 모두 快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副應敎 韓纘男등이 「檢閱 嚴惺이 儒生 20여명을 科擧에 應試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動搖國母得罪綱常」이라는 罪目을 붙였다고 光海君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이때 光海君 옆에 侍立하고 있던 檢閱(史官)嚴惺公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李偉卿 등의 上疏文에 慈殿(母后)이 逆謀에 外應했으므로 母子間의 道理가 끊겼다고 하였습니다. 慈殿은 바로 殿下의 어머님이신데 함부로 悖惡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전부터 예규에 따라 선비에게 죄가 있을 경우 먼저 儒籍에서 삭제하고 科擧에 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月餘前의 일인데 지금 와서 惟獨臣(惺公)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신이 反論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가까이에서 붓을 잡고 있는 者로서 남의 排斥을 받았으니....官職에 있을수 없어 물려나기를 청합니다.」하자 光海君은 辭職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光海君l 內殿에 들어가 한참 있다가 다시 나와서 매우 激怒하며 「嚴惺은 오늘 붓을 잡는 業務에 해당되지 않으니 遞差(해직)하도록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다음날 政院이 上疏를 올려 「只尺에서 보는 史官의 任務는 막중한데 해직할 때 公論을 기다리지 않고 面前에서 척결한 것」을 들어 諫하였습니다. 그러나 光海君은 「내가 名色이 임금인데 1개 史官도 처치할 수 없단 말인가. 政院은 黨을 비호하는 發言을 하지 말라」하고 削奪官職하였습니다. 이리하여 惺公은 大北派의 仁穆大妃에 대한 廢妃論에 힙쓸려 관직에 나아간지 8個月만에 척출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惺公은 西湖에 은거하다가 양산에서 유량생활을 하며 한때 행적을 감추고 貯水池에서 낚시질로 消日하셨습니다. 그런데 光海君은 黨爭에 힙쓸려 永昌大君을 죽이고 母后 仁穆大妃를 西宮에 幽閉시키는 등 悖倫行爲가 많았고 政治가 문란해지자 李貴, 崔鳴吉, 金自點 등이 光海君을 廢位시키고 綾陽君 悰을 받드러 仁祖反正을 일으켰습니다. 1623年(仁祖 卽位年)에 仁祖가 오르자 곧 3月16日 惺公은 官職을 削黜당한지 11年만에 다시 檢閱에 복직되었는데 史官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일찍이 癸丑年(1613年)에 李偉卿이 흉도19人을 거느리고 처음으로 廢母上疏를 올렸을때 惺이 當時 四館에 있으면서 「國母를 動搖케 하니 그 罪가 紀綱에 關係된다」하며 모두 停擧시켰다. 이 때문에 흉도들의 꺼리는 바가 되어 削奪官職되고 門外出送 당해 十여년이 되었다. 이때 다시 史局에 들어갔다』다시 復職된 惺公은 1624年 (仁祖2年)2月12日 副修撰을 거쳐 곧 弘文館의 敎理가 되시고 御前에서 侍講하는 侍講官을 겸무하셨습니다. 公은 宋象賢의 祠宇에 賜額을 주청하여 允許받았는데 늦어지자 『國家는 반드시 節義를 崇尙해야 한다며 지난번「李适의 變」때만 보더라도 節義가 國歌에 關係됨이 큰 만큼 반드시 평소에 격려하여 권장하는 바탕을 삼도록 힘써야 한다』고 上奏하여 곧 施行토록 하였습니다. 이해 十月 惺公은 獻納을 거쳐 다음해 1625年(仁祖3年)2月 侍講院의 弼善(正四品)이 되시고 얼마후 司憲府의 執義(從三品)를 거쳐 5月에는 司諫院의 司諫이 되셨습니다. 이에 앞서 大司憲 朴車善과 執義嚴惺公은 富家와 士大夫家에서 不法으로 柴場(시장)을 점거하고 立案하여 京城數十里에 걸쳐 꼴이나 나무하는 百姓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民怨이 적지 않다고 上啓하여 그 積弊를 막으셨습니다.

1626年(仁祖5年)正月에 淸兵이 鴨綠江을 건너 大規模로 侵攻하여 丁酉胡亂이 닥쳤습니다. 이때 大司憲 박동선과 집의엄성공은 敵侵數日에 都城을 비우고 海島나 山城으로 피하지 말고 「殿下께서 혁혁히 奮發하시어 宮中에 나아가 直接 征伐에 나서시라」는 長文의 上啓를 올렸으나 仁祖大王은 「論한 바가 殆半(태반)은 實現性이 없다」하시고 江華로 떠나셨습니다. 얼마후 主和派 의 主張에 따라 兄弟國의 義를 和約하고 四月에 歸京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다시 靑軍의 侵攻을 당하는 受侮를 겪었던 것입니다.

1627年(仁祖5年)5月 惺公은 弘文館의 副應敎가 되시고 議政府의 舍人으로 御前에서 經書를 講論하는 자리에 出入하며 囑望되는 바 컸습니다. 그러나 지병으로 1628年(仁祖6年)4月8日 향년 54歲로 서거하셨습니다.

 

* 황공(愰公)

18世孫 諱 愰公은 1580年(宣祖13年)에 平市直長을 지내신 아버님 諱仁達公과 僉正 諱鎭公의 따님이신 貞夫人 靑松沈氏와의 사이에 次男으로 나셨습니다.

愰公은 六歲때 어머님을 여의고 13歲때 아버님마져 서거하시는 비운이 겹쳐 學問에 뜻을 두었으나 붓을 꺽고 1603年(宣祖36年) 24歲때 虎榜武科에 及第하였습니다. 9年후 1612年(光海君4年)에 兄되는 惺公이 增廣試文科에 及第하여 寒微한 家門에서 兄弟분이 함께 內外官職에 나가게 되셨습니다. 다음해 1604年(宣祖37年)에 愰公은 司僕寺의 主簿로 등용되시고 1606年(宣祖39年)6月에 南海縣令이 되셨으며 1607年(宣祖40年)十月에 都摠府都事가 되시면서 備邊司의 郎官을 겸임하셨습니다. 그뒤 安東判官을 거쳐 咸安郡守를 역임하는 동안 淸廉하고 剛直한 首令으로 名聲이 드높았으며 한편 청양산을 수축하여 國防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곤양군수로 있을때 愰公을 시기하는 者 들이 誣陷을 받아 한때 罷職되었으나 公 의 善政에 감동한 邑民들이 朝廷에 몰려와 그의 留任을 請願하여 마침내 그 陋名을 벗고 다시 곤양군수로 還任되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또한 愰公은 1615年(光海君7年)八月 무안군수로 在任하는 동안 거제현에 유배중인 張命順과 가까이 지냈다하여 司憲府의 지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618年(光海君十年)에 다시 함안군수가 되시고 1620年(光海君12年)에 嶺南左水使가 되시면서 折衝將軍(正三品堂上官)으로 승계하였습니다. 그런데 1624年(仁祖2年)七月 慶尙右水使로 在任할 때 糧穀七百餘石을 빼돌렸다하여 司憲府의 鞠問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다음해 1625年(仁祖3年)에 平山府使로 임명되시고 仁祖임금으로부터 平山의 山城은 國防에 중요하다고 전교하여 機械며 虎皮등을 특별 下賜받으셨습니다. 1626年(仁祖4年)에 義州府尹이 되시고 邊境防禦策에 특히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防備로 다음해 1627年(仁祖5年)二月에 丁卯胡亂이 발생하자 兵士들을 독려하여 끝까지 國境으 f死守하고 山城을 굳게 지키며 別途로 備蓄한 쌀 콩 등 軍需品으로 支給한 功으로 特別加資되여 嘉善大夫(從二品)로 昇階하셨습니다.

愰公은 1631年(仁祖9年)에 訓練院都正이 되시고 坡州牧使를 거쳐 1632年(仁祖十年)에 全羅道水軍節度使가 되셨습니다. 그후 1637年(仁祖15年)에 遂安, 靈岩郡守를 지내고 1639年(仁祖17年)에 平海郡守를 거쳐 忠淸道水軍節度使가 되셨습니다. 이때 愰公께서는 이미 六十歲가 되어 官職을 사임하시고 영덕고울에서 낚시로 消日하며 지내시다 1644年 (仁祖26年 )에 다시 春川府를 다스리며 儒學을 가르쳤으며 1648年(仁祖26年)에 內職인 同知中樞府事 겸 副摠管(正二品)을 겸임하셨습니다. 몇年이 지난 1652年(孝宗2年)에 다시 外職인 永興府使로 나가셨다가 다음해 1653年(孝宗4年)에 서거하시니 享年 74歲였습니다.

後日 次子 鼎耈의職位가 높아짐에 따라 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시고 著書로 「春川誌」가 傳하며 춘천백성들이 세운 「善政去思碑」가 春川鄕校 入口에 서있습니다.

 

* 민도공(敏道公)

18世孫 휘 敏道公은 1651年(孝宗2年)에 아버님 諱善耈공의 長子로 나셨습니다. 그 孝行이 至極하여 널리 世上에 알려지니 1708年(肅宗34年)에 나라에서 旌閭門을 特命하셨습니다. 1711年(肅宗37年)에 逝去하시니 享年61歲셨습니다.

 

* 정구공(鼎耈公)

19世孫 諱 鼎耈公은 1605年(宣祖38年)에 中樞府副摠管을 지내신 아버님 諱 愰公과 副提學을 지내신 諱浩公의 따님이신 어머님 光州李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字는 重叔 號는 滄浪.

少時부터 文藝에 才能이 뛰어나 慶州府使로 있는 25歲때인 1630年(仁祖8年)別試文科에 丙科로 급제하시고 承文院의 의 權知에 보임되셨습니다. 仁祖大王은 光海君과 執權派인 大北派를 몰아내고 陵陽君 倧을 王으로 옹립한 임금입니다.

公께서는 禮儀에 밝고 風貌가 俊秀하여 仁祖大王으로부터 恪別하신 寵愛를 받으셨다 합니다. 그러나 仁祖朝 당시는 안으로는 派爭이 甚(심)하고 밖으로는 丙子胡亂을 겪는 등 內憂外患으로 어려움이 많았을때 여서 公께서도 그 政爭에 휘말려 무서운 고역을 겪으셨습니다.

公께서는 1633年(仁祖11年)六月 崇思殿을 改題한 功勞로 말 14匹을 下賜받으셨으며 1635年(仁祖13年)11月 司諫院의 正言에 昇進하시고 다음해 1636年(仁祖14年)에 侍講院의 設書가 되셨습니다. 이해 12月에 靑軍이 侵入하여 丙子胡亂이 發生하자 國王이 南漢山城으로 피신할 때 王을 扈從(호종)하셨습니다.

다음해 1637年(仁祖15年)三月 司憲府의 持平이 되시고 1638年 11月에 修撰이 되셨으며 1640年(仁祖18年)九月에 暗行御史로 湖西地方에 派遣되시고 關西都事를 거쳐 11月에 弘文館의 副敎理 司憲府의 持平 1641年(仁祖19年)에 다시 弘文館의 敎理가 되셨습니다. 그후 1646年(仁祖24年)12月에 司諫院의 獻納이 되시고 義城縣令을 거쳐 다음해 六月에 吏曹佐郞이 되셨습니다. 이때 當代의 勢道家인 金自點의 權力만을 믿고 그의 아들 釴(익)이 專橫하며 承政院의 人事를 左右하는 銓郞에 들고자 할때 鼎耈公은 이를 極力 沮止하였습니다.

1648年(仁祖26年)에 다시 弘文館 修撰, 1649年(仁祖27年)에 司諫院의 司諫(從三品)으로 승계되시고 이어서 三房廳의 太僕寺 겸 春秋院의 編修官(正三品)이 되셨습니다. 이해에 仁祖大王이 昇遐하시고 孝宗임금이 卽位하시니 八月에 司憲府의 執儀가 되셨습니다.

이때 吏曹判書 沈詻(심액)의 人事 잘못을 彈劾할 때 鼎耈公께서 이를 辯護하다가 朋黨을 짓고 庇護할 計策만을 품고 辨明한다하여 罷職당하고 10月24日 다시 멀리 竄逐(찬축:죄인을 멀리 귀양보냄)되셨습니다.

기런데 다음해 1650年(孝宗元年)四月에 孝宗임금은 前年에 流配시켰던 黨爭에 관련된 李時昉, 이지항, 이시해, 신면, 이행진, 이이존, 이해창, 등을 다시 敍用하면서 鼎耈公도 復職되시고 1651年(孝宗2年)正月에 通正階(正三品堂上官)로 승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해에 金自點의 逆謀事件이 발생하여 鼎耈公도 억울하게 連累되었습니다. 즉 孝宗大王은 卽位하면서 父王때 겪은 丙子胡亂의 國恥를 씻고자 은밀히 淸 나라를 侵攻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領議政이면서 親淸派인 金自點이 이사실을 淸國에 밀고하여 淸國大國이 國境에 集結하고 그 眞相을 조사하는 國難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 12月에 朝廷은 金自點一黨을 處刑하게 되고 다음해 1652年(孝宗3年)1月9日 司憲府는 左承旨 鼎耈公도 金自點의 門客으로서 銓部에 있을때 金自點의 아들 釴(익)을 銓郞으로 천거하고자 했으므로 削奪官職하여 門外追送하라 하고 그후 論罪가 더욱 甚(심)해져서 마침내 極刑을 宣告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左議政 韓興一이 鼎耈公을 지난날 銓郞으로 있을때 金自點의 아들 익이 그 아비의 세도만을 믿고 驕慢放恣하기 그지없었는데 아부하는 郞僚들이 익을 추천하여 전랑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鼎耈公이 强力히 拒絶한 사실을 고하며 임금께 호소하여 크게 減刑받고 언천당에 귀양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후 효종임금이 승하하고 1660年(顯宗元年)6月10日 卽位한 현종임금께 前大司憲 沈之源이 아뢰기를 「臣이 憲長(大司憲)으로 있으면서 金自點의 黨與인 李時昉 이지항 등을 論劾하며 모두 罪를 입혔는데.... 여러해 지난 뒤에까지도 永遠히 廢人인 된다면 不當합니다.」金自點의 逆獄이 있은 후로 時輩들이 李惟泰를 使嗾(사주)하여 上疏하게 하고 이시만, 이지항, 이이존, 엄정구 등 여러사람을 自點의 黨與로 만들었고 지원은 헌저응로서 그들을 따라 論劾하여 지항 등이 罪廢되었습니다. 시만과 李存은 원래 自點에게 붙은 자들이었지만 之恒은 김익희에게 마음을 사고 황감은 文望 때문에 시배들로부터 시기를 당하였으며 엄정구는 시배들을 그르다고 했기 때문에 모두 誣陷으 ㄹ당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억울하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여러해가 지나서야 鼎耈公은 모든 혐의가 벗겨지고 顯宗임금은 그를 찾아 太僕寺正(正三品)에 다시 敍用하셨습니다. 얼마후 弘文館의 敎理, 承旨를 거쳐 1668年(顯宗9年)三月에 漢城左尹에 除授되셨습니다. 그후 五衛都摠府摠管을 겸하시다가 1670年(顯宗11年)에 逝去하시니 享年66歲셨습니다.

실록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鼎耈公은 젊어서 慶州府使로 到任하여 善政을 베푼 善政碑가 경주시 인왕동에 서있습니다.

 

* 즙(=집)공(緝公)

20世孫 緝公은 1635年(仁祖13年)에 司憲府監察을 지내신 아버님 諱聖耈公과 通德郞 諱夢尙公의 따님이신 어머님 貞夫人 順興安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緝公은 氣槪가 있고 淸廉하였으며 權門을 멀리하고 黨爭을 싫어하여 當世의 가장 完璧한 인물로 世人의 推仰을 받으셨습니다. 緝公은 1673年(顯宗14年)庭試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시고 1677年(肅宗3年)八月에 司諫院의 正言, 九月에 司憲府의 持平 등 빠른 승진을 거듭하셨습니다.

이해 六月 都堂錄의 20人중에 올라 이후 여러 차례 三司(司憲府 司諫院 弘文館)의 淸華職에 출입하여 1684年(肅宗十年)四月 司憲府의 執義(從三品)에 임명되셨습니다.

그런데 緝公께서는 每事를 規律대로 엄격하게 지키기로 有名하였습니다. 이해 七月 緝公이 執義에 除授될때 承政院에서 韓泰東을 체직하지 않고 다만 御命에 따랐습니다. 그런데 緝公이 말하기를 임금의 「傳旨를 捧入하지 않았으면 韓泰東은 오히려 遞職되지 않는 것이니 한 벼슬을 두사람이 받을 수 없다」하고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承政院은 韓泰東을 遞職하는 전지를 봉입한 다음에야 交遞된 緝公을 다시 任命한 일이 있었습니다. 緝公은 五月에 司諫院의 司諫(從三品)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肅宗時代는 張禧嬪事件등으로 禮論에 치우쳐 黨爭이 심하였고 淸廉强直한 緝公은 黨爭을 싫어하여 여러차례 誣陷도 받았고 難境도 겪었으며 1686年(肅宗12年)三月엔 一時 還牌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후 곧 承旨로 承繼되시고 在任하는 동안 南人과 西人간의 黨爭이 일기 시작하여 마침내 領相宋時烈이 賜死되는 己巳士禍(숙종15年~1689年)가 일어났습니다.

이 己巳士禍를 冒免(모면)한 緝公은 1689年(숙종15年)三月 外職 全羅道觀察使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뜻에 맞지 않아서 三個月만에 辭任하고자 上疏하였으나 肅宗임금의 간곡한 勸勉으로 다시 任地에 나갔습니다. 緝公은 1693年(肅宗19年)三月 承旨로 임명되고 12月에 司諫院의 大司諫(正三品堂上官)에 오르셨습니다. 이후 다시 甲戌獄事(肅宗20年)가 일어났습니다. 甲戌獄事를 넘긴 緝公은 1694年(肅宗20年)八月 承旨에 임명되시고 1696年(肅宗22年)二月 外職으로 나가 開城留守(從二品)에 승질하시고 한동안 平安監司를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二年後 1698年(肅宗24年)에 緝公은 都承旨(正三品堂上官)로 內職에 轉任되시고 이때부터 여러 가지의 重要한 上疏를 돌려 朝廷公論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1699年(肅宗25年)에 副司直으로 계시다가 다음해 1700年(肅宗26年)에 다시 刑曹判書에 제수되셨습니다. 이때 烽火를 든 徐日立 등이 스스로 上番하고 布를 바치지 말 것을 격쟁(擊錚)하여 알렸는데 刑判緝公이 上言하기를 本曹에서 嚴罰을 청하지 徒配(도배) 하라고 했으나 後日 폐단을 고려하여 法文에 없으니 여러 臣下에게 下詢하여 처리할 것을 상주(上奏)하였습니다. 强穩兩論이 분분하자 임금이 梟示(효시)를 명했는데 刑判緝公이 그 律이 過重함을 말씀드렸지만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해 八月 北道試官 서종태가 병으로 辭免되고 緝公에게 돌아왔으나 이미 65歲로 老衰(노쇠)하여 奉行하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이해 八月 工曹判書에 제수되셨는데 十月에 張禧嬪이 內殿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謀害하려한 事件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領相崔錫鼎이 世子를 위해 獄事中止를 상소하자 中途付處(귀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工曹判書 緝公은 다음과 같은 上疏를 올려 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하였습니다. 『王世子가 이제 막 罔極한 슬픔을 당하고 또 비상한 辨告를 만났는데 어머니의 목숨을 구하려 해도 辨解할 말이 없고 은혜로 용서해 주기를 빌고자 해도 王命이 至嚴한지라 감히 그러하지 못할 것이니, 情誼(정의)가 궁박하여 답답한 심사가 병이 된다면 우려되는 바가 어찌 國家와 관계되지 아니하겠습니까? 殿下께서 禧嬪을 法 대로 處罰하려는 것은 진실로 후일을 염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世子는 나라의 큰 根本이니 이로 인하여 끝내 몸을 傷하게 되고 마음 해치는데 이른다면 실로 온나라 臣民들의 눈앞에 닥친 切迫한 근심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 먼 將來만을 염려하고 가까운 問題를 염려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미리 防備하는 方途라면 어찌 죽음 以外의 다른 方途는 없겠습니까? 經常과 權道를 집착하여 恩惠와 法을 아울러 시행하는 것도 때에 따라 變化에 對處하는 뜻입니다. 만약 殿下께서 討罪하는데 급급해서 다시 參酌하여 헤아리지 아니 하시고 혹 世子의 處地를 輕忽하게 여기신다면 장차 반드시 後日에 끝없는 後悔가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 일은 張禧嬪이 自盡하고 崔錫鼎을 귀양간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肅宗임금은 後日「嬪卿에서 后妃로 昇格되는 일을 금하는 法」을 제정하였습니다. 後日 이 法에 따라 高宗은 嚴貴妃를 王后로 冊封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緝公은 1703年(肅宗29年)에 다시 開城留水에 제수되시고 七十으로 이미 노쇠한 緝公은 1706年(肅宗32年)七月 議政府의 左參贊(正二品)을 거쳐 禮曹判書를 歷任하신 다음 右參贊으로 계실 때 병환으로 致仕(年老하여 辭任)하시고 耆社所(70歲 以上文官이 入參하는 기노소)에 드셨습니다. 緝公께서는 平生동안 淸廉하시고 高潔하셨으며 晩年에 病으로 從仕하지 못하고 淸貧하여 醫藥도 쓸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左議政 서종태를 통하여 아신 肅宗임금이 상당량의 약물을 下賜하셨다 합니다. 1710年(肅宗36年)四月六日 逝去하시니 享年76歲셨습니다.

 

* 찬공(纘公)

20世孫 諱 纘公은 司憲府 監察을 지내신 아버님 諱 聖耈公과 通德郞諱夢尙公의 따님이신 贈貞夫人 順興安氏와의 사이에서 나시고 都摠府摠管을 지내신 鼎耈公의 系子십니다. 1691年(肅宗17年)五月 纘公이 忠州牧使때 그곳 衙前들이 사나와 그들을 棍杖으로 다스린 사실이 있었는데 經筵에서 纘公의 치적을 李玄逸이 아뢰자 임금이 그대로 留任하도록 하였습니다.

도한 1696年(肅宗26年)二月 吏曹에서 善政을 베푼 守令 19人을 抄錄하여 王께 報告하는 가운데 尙州牧使李恒 前牧使嚴纘公 등 19人이 수록되셨습니다. 1702年(肅宗28年)一月 淸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시고 1713年 (肅宗39年)에 逝去하였습니다.

 

* 윤공(綸公)

20世孫 諱 綸公은 1635年(仁祖13年)에 進士이신 아버님 諱 碩耈公과 領議政을 지내신 諱尹謙의 따님이신 어머님 海州吳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綸公은 司猛(李朝때의 軍職 八品)으로 奉職하다가 늦게 42歲때인 1678年(肅宗4年) 增廣試文科에 甲科로 及第하였습니다. 公은 敦寧府의 主簿를 거쳐 年代는 確認되지 안으나 成均館의 典籍(正六品)을 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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