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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학의 분수령 김종직
엄재훈  jheom915@yahoo.co.kr 2012-01-09 1831

    

       조선 도학의 분수령 김종직

 

세종13년(1431)에 출생하여,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6대 임금이 통치하던 시기에 살았다.

향년 62세(성종 22, 1492).

 

6세 때 부친 김숙자에게서 글을 배우고, 8세에 『소학』을 읽었다. 13세에 『주역』을 배웠다.

18세에 성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낙제했고, 25세에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했다.

26세에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낙제했다. 2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

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중앙직으로 홍문관 수찬, 이조좌랑, 조산대부를 거쳐 통정대부, 가선대부를 역임하고,

승정원도승지와 임금의 경연에 참가하는 경연참찬관, 홍문과제학 성균관사, 이조참판, 병조참한, 공조참판을 지냈다.

외직으로 영남 병마평사, 경기도 관찰사 겸개성유수, 전라도 관찰사 겸순찰사 전주부유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니까 김종직의 관직 진출 시기는 세조 대에서 성종 대에 이르는 데

이 시기는 조선 전기에서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

그의 사후에는 사화의 피바람이 맹렬하게 불었던 것이다.

 

 

김종직은 조선 전기 사림의 거두로 지목되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과 정여창-조광조에 이르는 도학(道學)의 계보를 잇는다.

특히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김일손 등은 조선 전기 사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자칭 ‘소학동자’라고 불렀던 김굉필은 김종직에게서 『소학』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참으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김종직의 가르침이 김굉필에게 주입되었고, 조광조에게로 이어졌다.

실천을 강조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정신이 『소학』을 통해 강조된 것이다.

그런데 『소학』 공부를 강조한 원조는 야은 길재이다.

길재에게 배운 부친 김숙자도 아들 김종직에게 『소학』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황, 허균, 이익, 이덕무, 장유 등의 후학들은 김종직의 학문에 대해서 낮게 평가하였다.

즉 그들은 김종직이 도학자가 아니라 일개의 문재(文才)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만 송시열은 김굉필, 조광조에 이르도록 김종직이 도학의 다리가 되었다는 부분을 인정하고 있다.

 

 

도학에서 중시한 의리의 측면에서 김종직은 후학들의 모진 비판을 받았다.

1498(연산군4)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로 보는데, 이 대결에서 선봉에 선 이는 유자광이다.

그는 김일손이 사초에서 세조 때의 기록을 문제삼아 점점 확대시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사림들을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김종직에게 녹을 내리는 문제와 사후 시호 문제가 발생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를 문제삼아 물고 늘어졌다.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이러한 일은 김종직을 사화의 최대 피해자로,

도학의 거두로 인식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자광이 김종직에 대해 날을 세운 것에 대해 후기 유학자 이긍익은 유자광이 함양군에 새겨서 걸어둔 시를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떼어 불태워버린 데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유자광은 성종의 명으로 김종직이 현판으로 달아둔 환취정(環翠亭)의 기문(記文)을 철거해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역시도 이전 함양에서의 일을 보복한 것이라 보기도 했다.

 

 

무오사화 이후 김종직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었다.

이에 대하여 허균은 김종직을 절의 면에서는 잘못한 것으로 비판한다.

허균은 「김종직론」에서 김종직이 「조의제문」과「화도연명술주」를 쓰고도

세조에게서 벼슬을 한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고 했다. 장유도 정몽주와 김종직을 의리 면에서 비교하였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 대에 벼슬을 하고도 창왕을 축출하여 그 공으로 공신까지 되었다.

김종직은 출사하기 전 27세에 「조의제문」을 짓고도, 세조 대에 벼슬을 했다.

이러한 행위는 마음과 모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이 무오사화를 겪은 후로는 선배의 잘잘못을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종직의 생애는 두루 여러 벼슬을 한 것과 문재를 날린 것이 뚜렷하다.

그에 비해 학문적으로는 업적이 일천하고, 도학을 하면서도 의리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

후학들로 하여금 비판의 여지가 남게 하였다.

 

김종직의 이런 태도는 부친 김숙자가 벼슬을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는 부친의 염원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간 듯하다.

따라서 대의적 입장과 개인적 입장에서 갈등이 많은 생애를 산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종직의 업적에서 두드러진 것은 김굉필, 정여창 등 걸출한 제자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생애는 스승의 처신을 보다 부끄럽게 보이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김종직이 부친의 생각을 담아내느라 평생 소신껏 소리내지 못하고 산 것에 비하면,

제자들은 스승의 생각을 벗어나 더 자유롭게 소신껏 살았다고 봐도 될까?

이는 生死에 관한 아주 중요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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