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渭滿門 世居 由來와 文化遺蹟
관리자  test@test.com 2012-01-06 1347

 

 

寧越嚴門 軍器公派 忠毅公系

 

聞慶市 山陽面 渭滿里 世居 由來와

 

文化遺蹟

                                

                   문경시청 문화예술과:엄원식

 

 

 

  

단일집성촌중 가장 큰 마을

영월엄씨(寧越嚴氏) 단일 세거지 중 전국최고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위만리(渭滿里)”는 영월엄씨의 본향인 강원도 영월 땅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인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에 위치한다. 마을명칭은 달리 “우마이” 또는 “우만(牛巒)”으로 불리며 순수한 영월엄씨로만 이루어진 동성집성촌(同姓集成村)으로서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몽진(蒙塵)과 관련이 있는 왕의산(王衣山, 338.6m) 남쪽자락아래 아름답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북쪽으로는 왕의산을 사이에 두고 문경시 산북면 회룡리(回龍里)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예천군 용궁면 송암리(松岩里)와, 서쪽으로 문경시 산양면 형천리(兄川里), 과곡리(果谷里)와, 동쪽으로는 예천군 용궁면 덕계리(德溪里)와 접해 있다. 문경시와 예천군의 경계에 위치한 까닭에 역사, 문화와 언어면에 있어 점이지대(漸移地帶)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시․군간 경계처럼, 강 또는 산을 중심으로 경계를 하지 않고 행정편의상 경계가 이루어져 지형상 특별한 경계를 느끼지는 못한다. 위만리는 조선후기까지 예천군에 포함된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문경시로 속한 지역이다.

원래 위만리는 상주 땅에 속해 있었으나 통일신라 때 예천에 속하여 오랫동안 지내오다 1895년에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얼마 있어 다시 예천에 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다시 문경으로 환원 되었다.

위만리가 예천에 속해 있었던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또는 송시열의 『송자대전』, 조선후기의 대학자 최석정의『명곡집』등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예천 등지에 후손들이 모여 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엄흥도와 후손들이 위만리를 위시한 인근지역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위만리의 자연부락으로는 의산, 웃우마이로 나뉘며 의산에 영월엄씨들이 정착하게 되자 충신의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하여 앞에 보이는 산을 충의산(忠義山), 의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을 의산 또는 의만산(義巒山)이라 칭하고 그 산록에 사당을 짓고 주위의 부락을 의산마을이라 불렀다.

위만리도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150여호 정도의 가구수와 400여명에 가까운 주민이 이곳에 살았으나 2009년 6월 현재는 50여년전 보다 절반으로 줄어든 87세대에 남자 89명, 여자 92명 등 모두 181명이 거주한다. 이곳도 다른 농촌지역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지금의 수준으로 주민의 수가 줄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산양면 30곳의 행정리 중 두 번째로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위만리 주민의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현대적 상설장이 생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일장 이용시 예천군 용궁장을 이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혼반관계도 인접지역인 예천과 많이 이루어졌으며, 중․고등학교 교육 또한 예천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위만리는 대대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위주로 한 전통농업지역 이었으며 현재는 마을주민이 대체적으로 부농에 속한다. 요즈음은 벼농사 외에도 오이, 감자 등 특용작물을 재배해 농가수입을 올리고 있다.

 

위만리 정착과정

마을 주변 곳곳에 남아 있는 오래된 분묘를 추정해 보았을 때 위만리는 인동장씨(仁同張氏)와 청주정씨(淸州鄭氏)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 남아 있는 묘소와 비문으로 확인해 보았을 때 영월엄씨 충의공파가 기록상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것은 비운의 왕 단종(조선 제6대왕)의 시신을 거두었던 엄흥도(嚴興道)의 증손자 엄희령(嚴希齡)의 둘째아들인 엄한의(嚴漢義, 1529<중종24>~1582<선조15>)가 1560년경 이 곳에 들어오면서 위만리의 역사는 시작된다 할 수 있다.

 

엄한의(嚴漢義)의 묘소는 위만리 의산에 위치하며 지금은 폐교된 의산초등학교 오른편 산릉 7부 능선에 있다. 이곳에는 엄한의의 맏아들인 엄천운(嚴天雲, 1568<선조 1>~1634<인조12>)묘소도 함께 있다.

엄천운이 죽고 나서 약 140여년 뒤인 1788년에 세워진 그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고 충신 참판 엄공흥도는 영월사람이다. 옛 천순정축년(1457)에 단종대왕이 영월에서 승하하셨을 적에 공이 그때 고을의 호장으로서 창졸간에 분충하고 진탕중에도 내몸을 잊고 시신을 안장한 후에 아들 호현과 더불어 령 밖의 예천땅에 피신하여 자손들이 이에 집을 이루었으나 두려워 숨어 지내어 관향과 이름과 자를 고침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백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조금식 세상에 나갔으니 아! 슬프고 또한 기특한 일이로다. 영월의 고로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 일을 전하고 고을의 선비 엄영태가 자못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니 모두가 가히 고증되는 일이다”

이 기록으로 보았을 때는 당시 엄흥도가 이 곳 위만리(당시의 행정구역은 예천에 속했음)에 와서 일시 기거했다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엄흥도와 그의 아들인 호현 등의 묘소와 유품 등은 이곳에서 발견된 바는 없다.

그러나 당시까지 몰래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지만 엄한의 때에 오면 세상에 몸을 드러내 자유스럽게 활동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된다.

이를 뒷받침 하는 문헌으로는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서문동(徐文童 : 1634~1709)이 조정에서 처리했던 정치적 사건을 다룬『조야기문』에 의하면

“선조 을유년(1685) 영월군수 김늑이 엄흥도의 종손인 정병(正兵) 엄한례(嚴漢禮)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고 이어서 그 고을에 있는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고 문안(文案)을 만들어 주었다”

라고 되어 있다. 이 내용은 위만리에 처음 정착한 엄한의의 형인 엄한례를 각종 노역에서 면제시킨다는 것이다. 비로소 영월엄문이 어둠에서 빛을 보는 기회가 아닌가 한다.

 

엄한의의 증손자이자 엄천호(嚴天豪, 엄천운의 동생)의 손자인 엄태운(嚴泰運 1637<인조15>~1721<경종1>)의 묘표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보이고 있다.

“참판공(엄흥도)이 一자를 두니 호현은 정축년 이후로 세상을 피하여 예천군의 의만산(義巒山) 아래에 거주하고 간혹 숨어서 영월을 갔다 오기도 하였다. 호현의 자는 화요, 화의 자는 희령이요, 희령의 자는 한례이니 전력부위요 한의는 곧 태운의 증조이다. 여러 대를 위축해 지내니 아는 사람이 없는지라 거의가 호적에 편입되었더니 조 천호와 고 경세는 증군자감정이 되었다.”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1457년(세조 3)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후 삼족을 멸한한다는 어명으로 인해 계룡산 등지에서 숨어살던 우리의 선조들은 쉽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엄흥도의 유훈에 따라 집안을 보전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세상이 밝아지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보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기에 엄흥도와 그의 아들들은 정확히 어느 곳에 거주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위의 엄천운과 엄태운의 비문을 각각 살펴본 바 당시 예천 땅 이었던 위만리에 어느 정도 기거했음을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위만리에 남아있는 문화유산

 

1) 충의공 엄흥도신도비

지금은 폐교가 된 의산초등학교 앞에 죽음을 무릎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신도비가 서있다. 원래 이 비의 비문은 1874년 승지 엄주완이 썼으나 당시에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비를 건립하지 못하다가 1962년 임인보(壬寅普) 족보를 수정할 때 문경군의 도움과 마을 동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신도비 주변에는 방형 담장을 둘러 비를 보호하였으며 입구는 창살문으로 만들었다. 귀부는 거북의 형상으로 일반형태를 취하였고 비신은 화강석을 이수는 용 두 마리가 휘어감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 비는 아마도 의산서원이 정상 운영이 될 때 지역유림과 마을간에 서로 힘을 합쳐 엄흥도(嚴興道)에 대한 현양사업으로 추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학교 입구에 신도비를 세운 이유는 이 곳에서 나고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때 고향과 선조를 잊지 말고 살라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한다.

 

 

충의공엄선생신도비(忠毅公嚴先生神道碑) 비문원문

 

匹夫而仗精忠之大節隻手而扶網常之正義昭乎日月不足以爲明嵬乎泰率不足以爲高者其惟特立獨行之士素養弘毅剛正之氣臨大難處大變雖湯火在前桁楊在後少不挫志奮勇以赴之以證夫天理之未泯彛性之不墜莊陵遇變之日若忠毅嚴公卽其人也公諱興道寧越人以郡戶長首于諸吏端宗丙子王遜于寧越翌年丁丑禍作遺弓劍于觀風樓時倫綱倒地殃咎屛息相戒莫近公往來獄街號泣具衣對以劍家人咸爲公懼之公曰爲善而遇害吾所甘心又恐有異議夜半竊負而崩于冬乙旨卽今之珠邱也旣封率家族亡去不知所終東鶴誌云公以龍袍招魂入東鶴寺與金時習成聃壽諸公服喪三年公所守之義盡于此矣後其子潛歸故土葬公于八溪卯向之原又亡去卒以免禍此公盡忠端廟之大略也顯宗戊申右議政宋時烈筵奏曰衰世尤當崇尙節義請錄嚴某之後以作世道勸上嘉納肅宗乙丑建六臣祠以公綴于南壁戊寅追封莊陵命贈工曹佐郞訪其後其後乙丑賜額彰節書院英朝丙午命旌閭戊寅致祭癸亥加贈公工曹參議有收用子孫之敎庚午士林議立尙節祠于醴泉義山卽子孫所居地也其後癸未陞爲院廟號忠節戊寅贈工曹參判親製文賜祭墓所正廟辛亥命配食于忠臣壇純祖癸巳加贈資憲大夫工曹判書高宗丁丑贈諡忠毅庚子命不挑祀此累朝奬公忠義之顚末也於乎莊光之際尙忍言哉天地飜覆禍患慘酷至於六臣就戮極矣雖素所煦濡於上王之庭者皆凜然莫敢出一口氣公獨挻身於衆胥之中奮忠於危難之際毅然爲莊陵盡節使弓劍無損珠丘永妥亦安知非出於天意耶向所謂仗大節扶正義以證夫天理未泯彛性不墜者舍公而其誰耶彼狐媚狗苟背恩貪利朝爲君臣暮爲讐敵전然而立于世者皆公之罪人也噫公有三子長好賢次光舜次聖賢好賢二男長曰和次曰順和二男曰希齡承軫順二男曰潤海潤河希齡子曰漢禮漢義漢輔承軫子曰天一定一宗一思一漢禮子曰應坦應平應一漢義子曰天雲天豪天遜天龍漢輔子曰應瑞應鶴應仁應發應坦无后以天雲子壽吉入系餘竝略十五世祀孫柱鎬送琦變聖燮以隧道文屬柱完曰令公先大人肅敏公曾識之而今將營竪神道碑上以答聖朝奬忠之優恩下以慰先祖泉臺之精靈令公其識之柱完在同宗之列承先考之遺志義不敢辭因序之而銘曰天道茫昧有常有變常者易知變者難辨孰云邪正混淆莫定必待百世公義始彰莊陵遜位兩儀昏朦淸浦月黑痛矣泣弓一呼一吸頃刻霹靂臣隣因舌道塗側目公時奮忠半夜含聲親具棺劍竊負而崩象設追擧珠邱永寧陵谷依然松栢凄凉公與六臣精爽不昧奉慰王靈陟降左右累朝贈弛恩渥禮優煌煌寶誥榮施九幽樹風千載扶倫立極凡具彛性視此牲石

崇禎紀元後五甲戌月日前承旨宗後生柱完記宗人允變書成均博士完山李昇圭篆

 

충의공엄선생신도비(忠毅公嚴先生神道碑) 비문해제

 

匹夫가 되어 精忠의 大節을 쫓아 獨力으로 網常의 正義를 지키니 日月보다 밝다 해도 밝음이 부족할 것이요. 泰山보다 높다 해도 높힘이 부족하다 함은 그 오직 특립하고 독행하는 志士가 본래 크고 의연하며 굳고 바른 기상을 길러서 大難大變에 임하고 처함에 비록 불로 지지는 형벌이 앞에 있고 손발을 꼭꼭 묶는 질형이 뒤에서 핍박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奮然히 나아가니 대저 天理의 잠기지 않음과 彛性이 떨어지지 않음을 증험함이라. 端宗이 變을 당한 날의 忠毅嚴公같은 분이 곧 그런 분이다. 公의 諱는 興道요 寧越사람이니 郡의 戶長으로 뭇 鄕吏의 우두머리이다. 端宗丙子년에 王이 寧越에 避遁하시고, 이듬해 丁丑에 禍를 입어셔서 觀風樓에 弓劍을 버리시니(昇遐하시니), 때에 倫綱이 땅에 떨어져서(사람들이) 재앙과 책망을 당할가봐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여 접근하는이가 없었는데 公이 獄街를 왕래하고 호읍하면서 황실의 衣帶를 갖추어 염(斂)하니 집안 사람들이 모두 公을 위하여 두렵게 느끼거늘 公이 가로대 善한 일을 하다가 害를 입는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하고, 또 다른 의론이 있을까 걱정하여 夜半에 가만히 업고 冬乙旨에 장사지내니 곧 지금의 珠丘이다. 봉분을 다 짓고는 가족을 이끌고 사라지니 마친곳을 알지 못하더라. 東鶴誌에 말하되 公이 龍袍로 초혼을 하고, 東鶴寺에 들어가서 金時習成聃壽등 제공으로 더불어 三년의 喪을 입었다하니 公이 지키는 바 義를 이에 다 하였다 할것이다. 후에 그의 아들이 몰래 옛 땅에 돌아와서 公을 八溪의 卯向의 原에 장사지내고 또 타향으로 사라저서 마침내 화를 면하니 이것이 公이 端宗에게 충성을 다 한 대략이다. 顯宗九년 무신(一六六八)에 右議政宋時烈이 經筵에서 상주하여 아뢰기를 衰世엔 절의를 숭상함이 더욱 마땅하니 청하옵건데 嚴某의 後를 錄하여써 세상의 도리를 삼아 권장하소서. 上께서 가납하시고 肅宗十一년 을축(一六八五)에 六臣祠를 세워 公을 봉향케 하시고, 二十四년 무인(一六九八)에〔端宗의 陵을〕莊陵으로 추봉하시고, 〔公을〕工曹佐郞으로 追贈할 것을 명하시고, 그 후손을 찾게 하셨다. 그 후 을축년에 彰節書院이라 賜額하시고, 英祖三十二년 병자(一七五六)에 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시고, 무인년에 致祭케 하시고, 계해년에 公에게 工曹參議를 加贈하시고 자손을 관에 임명하도록 하는 하교가 있었다. 경오년에 士林에서 의논하여 醴泉땅 義山里에 尙節祠를 세우니 곧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 후 계미년에 院으로 승격하여 廟號를 忠節이라하고, 무인년에 工曹參判을 추증하시고 친히 글을 지어 公의 묘소에 賜祭토록 하셨다. 正祖十五년 신해(一七九一)에 資憲大夫工曹判書를 추증하시고, 高宗十四년 정축(一八七七)에 忠毅라 贈諡하시고, 경자년에 不桃祀(제사를 폐하지 않는 것)를 명하시니 이것이 누대 왕조에서 公의 충의를 표창한 전말이다. 오회라. 端宗과 世祖의 일을 참아 어떻게 말하겠는가. 천지가 번복함에 화환이 참혹하여 六臣이 취륙되는 극황에 이르렀다. 비록 평소 상왕의 조정에서 길러진 신하들도 모두 늠연하게 감히 한 말씀을 내지 못하거늘 公이 홀로 뭇 胥吏중에서 몸을 던져 위란에 즈음하여 충의를 떨쳐 의연하게 端宗을 위하여 정의를 다하고 유체를 온전하게 珠丘에 안장하니 또한 어찌 하늘의 뜻에서 나온것이 아님을 알 것인가. 앞에서 소위 대절을 쫓아 정의를 지킴은 대저 天理가 물에 잠기지 아니하였고 彛性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한 사람이 公말고 그 누가 있는가. 저 여우의 미태와 개의 아양으로 背恩貪利하여 아침에 君臣이였다가 저녁에 원수사이가 되어서도 얼굴을 들고 세상에 서는 자는 모두 公의 죄인이라 할 것이다. 슬프다. 公에게 셋 아들이 있으니 맏은 好賢이요, 다음은 光舜이요, 다음은 聖賢이다. 好賢이 두 아들을 두니 맏이 和, 다음 順이요, 和는 두 아들을 두니 希齡, 承軫이요 順이 두 아들을 두니 潤海潤夏요, 希齡의 아들은 漢禮漢義漢輔요, 承軫의 아들은 天一定一思一이요, 漢禮의 아들은 應坦應平應一이요, 漢義의 아들은 天雲天豪天遜天龍이요, 漢輔의 아들은 應瑞應鶴應仁應發이요, 應坦은 무후하여 天雲의 아들 壽吉을 입계하였고 나머지는 생략하니라. 十五世祀孫柱鎬가 琦變聖變을 보내어 柱完에게 墓道文을 위촉하면서 가로대 令公의 先大人肅敏公께서 일찍이 기록하신 적이 있으나 이번에 神道碑를 세워서 위로는 聖朝에서 충의를 표장하는 우악하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선조 묘소의 정령을 위로하노니 公께서 기록하여 주소서라 하니 柱完이 同宗의 자리에 있고 先孝의 유지를 이어 받아야 하니 의리로도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지라 인하여 序하고 銘하여 가로대 天道가 茫茫하고 暗昧하니 有常有變이라. 常者는 알기 쉽고 變者는 분별하기 어렵구나. 누가 邪와 正이 뒤섞여 定함이 없고 반듯이 下世를 기다려야 公議가 비로소 드러난다 했던가. 端宗이 遜位함에 陰陽이 昏朦이라. 淸浦에 달이 검으니 돌아가심을 통곡하는도다. 一호흡 경각에 벽력이 치는지라 보필하는 신하가 입을 다물고 말문을 닫아 곁눈질 하거늘 公이 그 때 분연히 충성하여 야반에 울음 소리를 먹음고 염습입관하여 몰래 업어 장사지내니 象設이 追擧되어 珠玉언덕에 길이 평안하시리. 陵谷이 의연하고 송백이 처량하도다.公이 六臣으로 더불어 精魂이 不昧하여 王의 靈을 위로함에 左右를 오르내리는도다. 누조에서 贈譽하시니 恩禮가 우악하였다. 밝고 밝으신 寶敎시어 榮光이 九泉에 미쳤도다. 樹風千年에 人倫을 부존하고 본을 세우니 무릇 彛性을 갖추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崇禎紀元後五甲戌(一八七四) 月日에 前承旨宗後生柱完이 記하고, 宗人允燮이 書하고, 成均博士完山李昇圭가 篆書하다.

 

2) 충절사(忠節祠)와 상의재(尙義齋)

1995년 1월 14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2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건물들은 단종(端宗)·세조(世祖)때의 지사(志士)인 엄흥도(嚴興道)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당과 강당이다.

엄흥도는 영월 호장(戶長)으로 당시 영월에 안치된 노산군(魯山君)이 시해(弑害)되자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17세기 중반 이후 여말(麗末)의 충신(忠臣), 사육신(死六臣)등 충효에 대한 재평가와 대대적인 표창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엄흥도의 후손은 송시렬(宋時烈)의 건의로 등용되었고 그는 사육신과 함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1726년(영조 19)에 공조참의, 1833년(순조 33)에 공조판서로 증직되고 1877년(고종 14)에는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1750년(영조 26)에 그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별묘(別廟)를, 1756년(영조 32)에는 상의재(尙義齋)를 건립하였다. 1833년 의산서원(義山書院)으로 승격되었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안타깝게도 훼철되고 말았다. 1900년 후손들에 의해 의산서원 자리에 상절사가 복설(復設)되고, 마을 중앙 위패를 별묘에 봉안하여 충절사라 하였으며, 의산서원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상의재는 재사로 사용되고 있다. 상의재는 의산초등학교(최근 폐교됨) 뒷편에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충절사는 상의재 건너편에 마을 뒷산인 소재 우측편 남서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상의재는 강당건물에 주로 채택되는 퇴칸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 평면이며 방과 마루와는 사분합들문을 달았다. 건축양식은 무익공 소로수장이며 5량구조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뒤쪽에 방형 흙담을 둘린 단소가 일곽을 이루고 있다. 현 단소자리는 과거 사당이 있었으나 훼철된 후 사당을 중건하지 못하고 설단(設壇)만 하였으며 강당 전면 좌우에 동·서재가 있었다 한다. 좌측담에 기대어 자리하고 있는 주사(廚舍)는 П자형 건물로 남부지방의 민가형태이다.

충절사는 전퇴칸을 두고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위패가 배설되는 평범한 재사건물로 어칸을 퇴칸보다 조금 넓게 잡았다. 그리고 앞쪽은 익공양식으로 주상에 2익공살미를 얹고 주칸에 화반을 끼웠으나 배면은 그냥 굴도리로 처리하여 정면만 강조한 듯하다. 입구는 내삼문 형태로 되어 있으며 주변에 담장이 둘러쳐 있다.

 

지금까지 기와 보수 등 몇차례에 걸쳐 보수가 이루어 졌으나 현재 건물이 전체적으로 약 5°정도 뒤로 기울어져 있어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다.

 

3) 단소 (壇所)

일반적으로 단소 또는 묘단은 시신을 안치한 장소가 아니라 돌아가신 분의 뜻을 받들거나 생전에 매우 인연인 깊은 곳에 설치되는 예가 많이 있다.

위만리에도 5분을 한 곳에 모신 단소가 있어 아직까지 후손들이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영주 순흥땅에는 단종복위운동을 하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순흥지역에 거주하던 이름모를 순흥안씨들의 단소가 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묘소가 아닌 혼백을 달래기 위한 단소만 간소하게 차려져 있다.

위만리 단소는 상의재 뒤편 의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엄흥도의 아들인 호현(好賢), 호현의 아들인 화(和), 화의 아들인 희령(希齡), 희령의 아들인 한례(漢禮), 한례의 아들인 응탄(應坦)까지 이렇게 5대에 걸쳐 모셔져 있다.

 

 

(참고사항)

 

처사 엄천운의 묘표(處士 嚴天雲의 墓表)

 

故忠臣贈參判嚴公興道寧越人也在昔天順丁丑端宗大王昇遐于越中公時以郡戶長奮忠於倉卒之際忘身於震湯之中奉藏劒潟訖與子好賢避居于嶺外之酒泉子孫仍家焉而畏幻隱晦至變鄕貫名字人未有知之者過百有餘年始稍稍出于世旴亦悲且奇矣越之古老至今傳其事邑士嚴永泰錄之額詳皆可考也自參判公五傳而有曰天雲字晶卿天姿純實孝友兼備家甚貧躬自耕樵而未嘗有憂若之色克勤於定省之節雖紛擾急遞之際行之如一與其弟天豪至老同居常存大被衾也之樂終身隱遯不出人以嚴處士稱之於乎公之居家篤行亦豈無所自而然乎哉參判公之孫曰將仕郞和於公爲曾祖祖希齡考漢義枇竺山全氏學生喆之女也公生于隆慶戊辰歿于崇禎甲戌壽六十七葬于郡西紫陽洞癸坐原聚潘南朴氏殷之女謹守閨儀奉君子無違生後四年歿與公同年墓用附左之禮男二人長壽日有二男成敏成德次壽吉有四男啓功郞承善贈掌樂正一善後善益善內外曾玄以下多不能盡記惟其奉先睦族克紹其家承善之曾孫昌伯一善之孫聖化最焉一善之贈官以曾孫重昌壽秩也重昌之子尙寬與昌震重彬鳩財伐石欲侈其先墓請銘於余余固不文然於參判公實爲曠世之感嘗謂公之危忠苦節與六臣同歸而論其保有珠邱之功尤有異焉違矣哉今於公之孫徵後之文何可辭爲就其狀略加刪潤而勤書參判公當日樹立기後孫韜晦之實以歸之遂爲銘曰酒泉之西義山之陽是惟忠臣遺裔之藏後之過者勿夷傷

參判朴基正撰

 

<譯文>

 

故忠臣參判嚴公興道는 寧越사람이다. 옛 天順정축년(一四五七)에 端宗大王이 寧越에서 승하하셨을 적에 公이 그때 고을의 戶長으로서 창졸간에 분충하고 진탕중에도 내몸을 잊고 시신을 안장한 후에 아들 好賢과 더불어 령 밖의 醴泉땅에 피신하여 자손들이 이에 집을 이루었으나 두려워 숨어 지내어 貫鄕과 이름과 자를 고침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백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조금식 세상에 나갔으니 아! 슬프고 또한 기특한 일이로다. 寧越의 고로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 일을 전하고 고을의 선비 嚴永泰가 자못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니 모두가 가히 고증되는 일이다. 參判公으로부터 五대를 내려와서 天雲이 있었으니 자가 晶卿이요 천자가 순실하고 효우가 겸비하였다. 집이 매우 빈궁하며 몸소 농사짓고 땔감을 날랐으나 일찍이 근심하고 고생스러워 하는 빛을 낸적이 없었고 어버이 섬기는 일에 극진하였으며 비록 얽히고 급한 때라도 여일하게 행동하였다. 아우 天豪와 노인이 될때까지 동거하여 항상 한이불속에서 같이 잠자고 지내며 종신토록 그몸을 숨겨 내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嚴處士라 칭하였다. 오회라 公의 거가독행이 어찌 스스로 할 바가 없어서 그러했는가. 參判公의 손자는 將仕郞和이니 公에게 증조가 되고, 조는 希齡이요, 고는 漢義이다. 비는 竺山全씨이니 학생 喆의 녀이다. 公은 隆慶무진(一五六八)에 나서 崇禎갑술(一六三四)에 몰하니 수가 六十七이요. 고을 서쪽의 紫陽洞의 계자원에 장례지냈다. 潘南朴씨 殷의 딸을 취했는데 규중예의를 잘 지키고 봉군자에 어긋남이 없었다. 公보다 四년후에 나고 公과 같은 해에 몰하니 묘를 합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인 壽日은 두 아들 成敏成德을 두었고, 차남인 壽吉은 넷 아들을 두니 啓功郞承善이요 贈掌樂院正이니 一善과 後善益善이다. 내외의 증·현손이하는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생각컨데 조상을 받들고 일족과 화목하며 그 집을 잘 지켜온 사람은 承善의 증손 昌伯과 一善의 손 聖化가 가장 두더러지며 一善의 贈官은 증손 重昌의 壽秩로 받은 것이다. 重昌의 자 尙寬이 昌震重彬등과 더불어 재화를 모아 돌을 깎아 선조의 묘를 꾸미고자 나에게 명해 줄것을 청하니 내가 불문이나 그러나 參判公은 실로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충절이라 일찍이 이르기를 公의 위충고절은 六臣과 한가지요 그 능침을 보존하고 있게한 공은 더욱 특이함이 있지 않은가. 아름답구나 이제 公의 후손에게 뒤를 밝혀주는 글을 내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 기장에 약간의 가감을 하여 삼가 쓰노니, 參判公의 그때 세운 장한 일이 후손들의 은둔의 과실이 되어 돌아 왔도다. 명하여 가로데 醴泉땅 서쪽 義山의 양지는 시유 충신 후예의 묘소이니 후세에 지나는 자 다치지 말고 상하지 말찌어다.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겸 經筵侍讀官春秋館記註官漢學敎授中學

敎授文臣겸 宣傳官朴基正이 찬하고 進士東陽申紹陽이 쓰다.

崇禎후三무신(一七八八)十월일에 세우다.

 

공조참의 엄태운의 묘표(工曹參議嚴泰運의 墓表)

 

嶠之南醴泉郡有嚴其姓而名泰運者籍于寧越卽莊陵忠臣贈參判諱興道七世孫也參判公貞忠苦節昭載於國乘野史塗人耳目不待更述也於乎非公倂死奮義盡心終事則一區仙寢將無以保有今日偉乎其功烈亦豈與一時出氣效力者論比哉參判公有一子曰好賢自丁丑以後避世居醴泉郡義巒山下時或匿跡往接于越中好賢子曰和和子曰希齡希齡子曰漢禮展力副尉曰漢義卽泰運之曾祖也累世畏約無有知之者幾於編戶祖天豪考慶世贈軍資監正枇酒泉林氏武科得梅女以崇禎丁丑生泰運慨然有志始爲儒業家甚貧蔞而事親以誠朝夕之供非異味不進也姉妹之貧而無依者率皆優恤之靭置祭田於參判公墓以供芬苾其近世先墓亦如以至於親族之無祀者竝擧香火人謂參判公有孫矣歿于景泰辛丑壽八十六葬于尙州長甘谷騎龍負壬之原以孫斗鼎壽職贈工曹參議娶長興裵氏興富之女亦能恭執婦道養舅盡誠奉君子以禮鄕黨稱之生于戊寅終于丙午壽八十九墓附後贈淑夫人擧皆五男四女長宗杰同樞次有杰次潤杰贈參判次時杰次成杰同樞女適金起漢丁好鳳全克洙張星漢孫男斗參斗柄斗載僉樞長房出斗平斗山斗滿斗光仲房出斗章斗鼎同樞三房出斗榮斗樞四房出斗謙斗相斗杓季房出內外曾玄多不盡記何其盛矣哉斗榮之子重友以再從兄重一重聃遺意來請其曾祖墓道之文於不영噫不영於越中壇遺祠院之役承命董工又竪碑於參判公旌閭以寓景仰之義今公遺孫圭首之託義不敢辭謹按其狀撰次如右於乎丙子錄曰嚴公子孫必富貴余嘗歎古人達理之論今聞參判公後裔摠爲百餘人讀詩書爲儒者信乎天道之有定而乃有祐善之報耶嚴氏之門其昌大也晉陽河應淸書

 

<譯文>

 

嶺南의 醴泉郡에 성명이 嚴泰運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貫이 寧越이니 즉 莊陵충신이요 贈參判휘 興道의 七세손이다. 參判公의 충정고절은 국사와 야사에 소상하게 실려 있어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므로 다시 기술할 필요가 없을 것이려니와 심기를 다한 일마무리가 아니었으면 일구의 능침을 오늘날까지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룩하도다 그 공렬이여! 이 어찌 한때의 분기로 힘을 쓴 사람들과 한가지로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參判公이 一자를 두니 好賢은 정축년이후로 세상을 피하여 醴泉郡의 義巒山아래에 거주하고 간혹 숨어서 寧越을 갔다오기도 하였다. 好賢의 자는 和요, 和의 자는 希齡이요, 希齡의 자는 漢禮이니 展力副尉요 漢義는 곧 泰運의 증조이다. 여러 대를 위축해 지내니 아는 사람이 없는지라 거의가 호적에 편입되었더니 조 天豪와 고 慶世는 贈軍資監正이 되었다. 비는 醴泉林씨이니 武科得梅의 녀로 崇禎정축(一六三七)에 출생하였다. 泰運이 개연히 뜻을 두어 비로소 유업을 시작하고 집이 몹씨 가난하였으나 사친에 정성을 다하여 조석의 진지를 맛있는 것이 아니면 드리지 아니하였다. 자매가운데 가난하고 의지할데 없는 자를 거느리고 모두 잘 도와 주었으며, 參判公의 묘소에 위토를 마련하여 향화에 하고, 근대의 선조 묘소에도 또한 그렇게 하였으며, 친족가운데 제사지내는 사람이 없는 묘까지 아울러 향화를 올리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參判公이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고 하였다. 景宗신축(一七二一)에 몰하니 수가 八十六세라, 尙州長甘谷騎龍의 임좌원에 장사지냈으며, 손자 斗鼎의 壽職으로 贈工曹參議가 되었다. 長興裵씨 興富의 녀를 취하니 또한 부도를 잘 지켜 시어른 봉양을 극진히하고 봉군자를 예로써 하니 향당에서 칭찬하였다. 무인년(一六三八)에 나서 병오년(一七二六)에 몰하니 수가 八十九세라 묘를 公의 묘의 뒤에 부장하고 贈淑夫人을 받았다. 五남四녀를 두었는데 맏은 宗杰이니 同知中樞府事요, 다음이 有杰이요, 다음이 潤杰이니 贈參判이요, 다음이 時杰이요, 다음이 成杰이니 同知中樞府事요, 녀는 金起漢丁好鳳全克洙張星漢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에 斗參斗柄이요 斗載는 僉知中樞府事이니 맏이(장자)의 소생이요, 斗平斗山斗滿斗光은 둘째의 소생이요, 斗章과 斗鼎은 同知中樞府事이니 셋째의 소생이요, 斗榮斗樞는 넷째의 소생이요, 斗謙斗相斗杓는 끝의 소생이다. 내외의 증·현손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니 그 얼마나 창성한 일인가! 斗榮의 자 重友가 와서 재종형 重一重聃의 유지에 따라 그 증조의 묘표의 글을 나에게 청하니 슬프다. 내가 越中壇遺祠院의 공사에 명을 받아 감독을 하고, 또 參判公의 정려에 비석을 세워 경앙하는 의를 표했더니 이제 公의 유손의 비석에 새길 비문을 부탁 받음에 의리로 감히 사양하지 못할 것이라. 삼가 그 행장을 살펴 위와 같이 찬하였다. 오회라. 丙子錄에 가로대 嚴公의 자손이 반듯이 부귀할 것이라 하였는데 내가 일찍 옛 사람의 달리한 이론에 탄복하였더니 이제 參判公의 후예가 모두 백여인이 되고 시서를 읽어 유자가 되었다 하니 믿을 일이 아닌가. 천도가 정함이 있어 이에 착함을 돕는 응보가 있는것일가. 嚴씨의 가문이 창대하는도다. 晋陽河應淸이 쓰다.

 

<추가 기록사항> - 마을에서 논의

□ 위만리 출신 인물 (또는 작고한 인물 중)

- 독립운동가

- 사업가

- 정치인

- 공무원 등

 

 

文科公派 鐵原 嗚植 家門
軍器公派 敎授公系 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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