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初期때 人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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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2-06-12조회수24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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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初期때 人物
* 유온공(有溫公) 始祖로부터 11世孫 諱有溫公은 高麗 恭愍王初期(1353~1374年)에 아버님 諱俊公과 府使諱義生公의 따님이신 鄭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有溫公은 高麗 恭愍王때 東北面 兵馬使 李成桂 휘하에서 元軍과 대전하고 남해에 출몰하는 倭敵을 토벌하는 등 武功을 세우고 李成桂가 1388年(우왕14年)에 요동정벌을 나갔다가 위화도에서 回軍하여 우왕을 廢하고 昌王을 세운 다음 軍權을 장악한 얼마후 朝鮮王朝를 開國할 때 함께 協力하여 開國原從功臣에 오르셨습니다. 朝鮮建國 직후의 混亂期에 八王子들의 王位爭奪문제로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이 있는 동안 有溫公께서는 크게 개탄하며 협력하지 아니하여 王位에 오른 太宗은 1401年 太宗元年(辛巳) 2月2日 金仁貴전大將, 前監嚴有溫公 등 28人을 外地에 귀양(流配)보냈습니다. 그러나 太宗이 죽고 세로 왕위에 오른 世宗大王은 太祖時節의 舊臣들을 다시 중용하여 1418年(世宗卽位 元年) 9月15日 禹博을 中軍摠制로 嚴有溫公과 金斗南을 左軍同知摠制(從二品)로 李叔畝를 右軍同知摠制로 삼게 되어 공께서 다시 관직에 나가셨다. 世宗大王이 上王을 모시고 平山에 行次하실 때 領議政柳正顯 등 대신들과 左軍同知摠制 嚴有溫公이 御駕를 扈從(王駕를 모시고 따라감)하였습니다. 이해 1419年 12月17日 별세하시어 나라에서 賻儀로 종이 70권을 내리셨습니다. 配位貞夫人은 密陽朴氏이시며 長子克仁을 남기셨습니다.
* 간 공(幹 公) 朝鮮世宗때의 文臣으로 고려조말 1380年에 상주에서 출생하시어 빈궁한 가정에서 학업에 전념하여 幼學으로 34世에 1414年(朝鮮太宗14年)에 親試에 乙科三等으로 급제하고 1420年(世宗2年)에 學祿에 임명되셨습니다. 朝鮮朝에 들어 嚴門最初로 大科에 及第의 영광을 안으셨습니다. 그러나 집안이 너무 貧寒하여 父母님을 위하여 官職을 버리고 地方으로 내려가 13年 동안이나 微官末職에 머물며 半平生을 지냈습니다. 公의 孝行은 1429年(世宗11年)9月24日 藝文奉敎 崔自淵, 成均博士 崔孟夏 등의 上書로 다음과 같이 알려졌습니다. 「君父의 義는 하나이니 忠孝의 道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經書에 “어버이 섬김에 資賴하여 임금을 섬겨 恭敬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어버이를 섬김에 孝道로써 하는 까닭에 임금에게 忠誠으로 옮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忠臣은 孝子의 집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후 공은 50歲지나서여 成均博士 主簿겸 世子右正字, 司憲府 監察(正六品)을 지내셨습니다.
* 흥도공(興道公) 12世孫 諱興道公은 朝鮮初에 강원도 영월서 戶長이신 아버님 諱漢箸公과 어머님 原州原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흥도공은 영월의 豪族으로서 그 先代부터 戶長(鄕職의 首長)을 지냈으므로 그곳의 戶長으로 계셨습니다. 당시의 世宗大王이 在位 23年만에 昇遐하고 병약한 文宗이 王位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겨우 在位 2年여만에 昇遐하고 十歲때 長子世襲에 따라 1452年(端宗卽位年)에 寶位에 올랐습니다. 文宗임금은 어린 世子를 위해 重臣 皇甫仁, 金宗瑞 등에게 輔弼을 명하고 集賢殿의 成三問, 申叔舟 등에게도 부탁하는 遺言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首陽大君은 1453年(端宗元年)10月 鄭麟趾, 韓明澮 등이 皇甫仁, 金宗瑞 등을 慘殺한 다음 1455年(端宗3年)6月 조카 단종임금을 上王으로 삼고 王位를 찬탈하였습니다. 이어서 1456年(世祖2年)6月 成三問, 朴彭年 등六臣의 端宗復位 음모가 김찬의 배신으로 탄로나 慘刑당하고 1457年(世祖3年)6月에 上王은 魯山君으로 降封되어 영월의 청령포에 流配되었습니다. 이때 嚴戶長은 임금의 動靜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던차 어느날밤 울음소리를 듣고 괴이하게 여겨 江을 헤엄쳐 謫所에 이르러 魯山君을 뵈온 이후부터 밤마다 尋訪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江물이 불어 謫所를 영월읍내 觀風軒으로 옮긴 뒤에도 가까이 모시고 魯山君이 出帝宮詩를 지으시니 興道公께서는 그 次韻詩를 지어 節義를 다짐한 記事도 傳하고 있습니다. 이해 10月들어 錦城大君이 全南順興에서 魯山復位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魯山君은 庶人이 되고 10月 24日 영월에서 죽음을 맡게 되었고 그 屍身은 三族을 滅한다는 嚴命이 내려 東江에 던져졌다합니다. 三族을 滅한다는 嚴命이 있음에도 興道公은 『좋은 일을 하고 禍를 당해도 내가 달게 여기는 바이다(爲善被禍 吾所甘心)』라고 하면서 魯山君을 殮葬하고 곤룡포를 거두어 계룡산 동학사에 모신 후 깊이 숨었다고 합니다. 그 후 1669年(顯宗十年) 正月 右議政宋時烈이 經筵에서 『어지러운 時代일수록 節義를 더욱 崇尙함이 옳을 것입니다. 청컨대 嚴興道의 後孫을 찾아 錄用하여 世道를 진작케 해야 합니다』하고 進言하니 임금이 그 子孫을 찾아 錄用하라 하였습니다. 그 뒤 1698年(肅宗24年)에 전縣監申圭의 魯山君 復位上疏에 따라 魯山은 端宗으로 復位되고 노산묘는 莊陵으로 追封되니 노산이 영월에서 승하한지 241年만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1699年에 肅宗임금은 興道公에게 工曹佐郞을 추증하였으며, 1743年(英祖19年)에 工曹參議에 가증되었으며, 1750年(英祖36年)에 工曹參判에 가증되고, 1833年(純祖33年)에 工曹判書 가증되었고, 1876年(高宗13年) 11月 20日에 忠毅라는 시호를 받으셨습니다. 조국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朝野의 名臣諸賢들이 公께서 남김 節義를 높이 평가하시고 莊陵 인근에 嚴興道忠毅公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 효량공(孝良公) 公의 아버님은 國材公이십니다. 1476年(成宗7年) 別試文科에 丙科로 급제하시고 訓導로 있다가 1482年(成宗13年)에 成均館의 博士가 되었다. 朝鮮初期에 嚴門에서 세 번째로 登科하였던 公은 후일 成均館의 典籍을 거쳐 府使(李朝初期의 大都護府使:正三品)을 지내셨습니다.
* 산수공(山壽公) 13世孫 諱山壽公은 世宗때 三軍都摠制府左軍同知摠制(從二品)을 지내신 諱有溫公의 長孫이며 12世孫 諱克仁公과 吏曹判書를 지내신 諱俯公의 全州崔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公의 三男二女중에 次女는 入闕하여 成宗임금의 貴人淑儀(正二品)가 되시고 그 따님 恭信(愼)翁主는 淸寧尉 韓景琛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成宗妃尹氏의 심한 질투로 妃의 體貌를 벗어나자 成宗十年(1479年)에 廢妃되고 다음해(1480年)에 賜死되었습니다. 이 廢妃尹氏의 所生 융이 成宗에 이어서 執權한 燕山君입니다. 燕山君은 廢妃尹氏가 貴人嚴淑儀와 鄭召儀의 참소로 죽었다는 奸臣任士洪의 誣告를 듣고 1504年 燕山君十年 3月 20日 嚴. 鄭兩淑儀를 복살하였습니다. 그리고 律文에 連坐할 수 없는 82세인 親庭아버님과 誨. 誡 두오라버니 그리고 큰 언니 丹溪副正의 아내 金召使 서누이 등을 모두 유배시키고 家産을 모두 籍沒하였습니다. 또 燕山君은 嚴淑儀의 姓을 쓰지 못하게 하여 史官은 銀召使라 쓰고 4月 1日 山壽公은 慘刑을 당하였습니다. 다음해 1505年(燕山君11年)1月 16日 燕山君은 山壽公의 遺骨을 갈아 江건너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流配한지 2年만인 1506年(燕山君12年)7月1日 嚴淑儀의 오라버니 誨. 誡 두분도 梟首刑에 處했는데 이로써 燕山君은 嚴淑儀의 親庭을 완전히 破滅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嚴. 鄭兩淑儀를 誣告하고 出世했던 奸臣 任士洪도 1506年(燕山君12年)4月17日 中國使臣을 恭待하지 않은 罪로 處罰받게 되니 이때 使臣은 任士洪의 嚴. 鄭兩淑儀誣告사실을 처음으로 기술하게 된 것입니다. 中宗이 즉위 되시고 同11月11日 嚴淑儀는 特命으로 復位되고 親庭 아버님 山壽公과 두오라버니 誨. 誡公도 뒤에 嘉善大夫 工曹參議로 추증되셨습니다.
* 송수공(松壽公) 13世孫 諱松壽公은 1447年(世宗29年)에 아버님 諱克仁公과 李朝判書 諱俯公의 따님 全州崔氏와의 사이에 次男으로 태어났다. 公은 縣監을 지내시고 1468年(世祖13年)에 式年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承文院의 敎理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松壽公은 山壽公과 兄弟뿐인 까닭에 燕山君朝의 甲子士禍(1504年)로 姪女인 嚴貴人(成宗의 貴人)의 慘禍 때 系子인 誨公도 慘死당하게 되고 官界를 떠나야 했으며 山壽公一家의 慘變과 더불어 모든 記錄이 逸失된듯 傳하는 바가 없습니다.
* 용순공(用順公) 15世孫 諱用順公은 摠制公의 高孫이며 燕山朝때 嚴貴人의 甲子慘禍로 生卒등 記錄이 모두 滅失되었습니다. 아버님 繕工監奉仕 諱訓公과 어머님 淑人張氏외의 사이에서 三男으로 나셨습니다. 用順公은 中宗朝에 司馬試에 合格하였으나 1519年(中宗14年) 11月에 南袞 沈貞 洪星周등의 勳舊宰相들이 趙光祖 金淨 金湜등의 젊은 新進士類들을 몰아내고 귀양보내거나 賜死한 己卯士禍이후 科擧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평생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공께서는 경기도이천부북에 있는 갈마산 아래의 도립리에 은거하며 느티나무를 심고 亭子를 지어 六槐亭이라 하고 그 아래에 금당지를 만들어 字號를 南塘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께서는 當代의 名儒 慕齋 金安國 蔡亭 등 齋賢과 더불어 道義를 講論하고 詩律을 읊으며 交遊하시니 學者들이 南塘先生이라 하셨습니다. 공이 지으신 많은 詩文이 金安國先生의 慕齋集에 실려 있고 또한 공이 쓴 文集 2卷이 後孫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공의 道義 깊은 志操와 高潔한 風流를 사람들은 오래도록 推仰하게 되어 이 事實이 이천읍지에 記載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 충정공(忠貞公) 諱 忠貞公은 강릉 출생이며 생. 졸과 선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嚴處士라고 불렸습니다. 忠貞公은 어렸을때 아버님을 여의고 가세가 매우 貧寒하였으나 朝夕으로 偏母곁을 떠나지 않고 精誠껏 봉양하였습니다. 어머님이 病席에 들자 山에서 鳥類를 잡아 손수 飮食을 마련해 드리고 밤이 되면 옷끈을 풀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곁에 지켜않아 극진히 看病하였다 합니다. 한편 부지런히 學業에 精進하여 詩, 賦, 經書 등에 이르기까지 通達하고 특히 易 中庸의 理致에 精通하였으며 司馬試에 合格하였습니다. 1554年(明宗9年)에 강원도관찰사 鄭俊이 上疏히기를 「嚴忠貞은 아비喪事에 禮法에 넘치게 哀痛해 하고 정성을 다하여 廬墓를 살았으며 偏母를 봉양함에 있어서도 至誠을 다하였으므로 온고을이 칭찬하고 도한 學問에 쓸만한 才質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上疏에 접한 明宗임금은 政院에 傳敎하여 「江陵에 사는 嚴忠貞에게 相當하는 官職을 除授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어머님이 逝去하시자 죽으로 延命하며 三年동안 廬墓살이를 하며 科擧에도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友人들이 科擧應試를 권하면 嚴忠貞公께서는 어머님을 위해서인데 어찌 一身의 榮達을 바라겠는가 하였습니다. 嚴忠貞公은 晩年에 우계현(강원도 강릉부근 지명)으로 移居하여 出水幽靜(山水絶景)한 곳을 골라 조그마한 茅屋을 짓고 窮乏한 생활을 계속하며 종신토록 晏然하였다 합니다. 嚴忠貞公의 名聲을 듣고 배움을 청하면 後學들에게 반드시 忠孝를 반드시 爲先으로 삼으라 이르고 紛華名利(명예와 이권)에 泊然하셨다 합니다. 이같은 嚴忠貞公을 鄕人들은 사랑하고 매우 尊敬하였다 합니다. 또한 嚴忠貞公의 文章이 簡明하고 韻致가 있으며 試 또한 壯麗하여 傳誦한 자가 몇百篇에 이른다 합니다. 朝廷에서 嚴忠貞公의 才質을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齋郞(齋官. 祭享때 香爐를 받드는 사람)에 제수하였으나 出仕하지 않으셨습니다. 嚴忠貞公은 임종일에 앞서 일찍부터 가까이 來往하던 몇사람과 學者10여명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死後에는 선영에 장사 지내주고 어린 孫子를 잘 부탁한다 하시고 평소에 쓰시던 書冊들은 門下生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단정히 않은 자세에서 穆然히 임종하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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