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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의 人物
작성자관리자(test@test.com)작성일2012-06-27조회수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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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後期의 人物

 

* 경수공(慶遂公)

二十一世孫 諱慶遂公은 一六七二年(顯宗十三年 壬子)에 禮曹判書를 지내신 아버님 諱緝公과 副詞勇을 지내신 諱震文公의 따님이신 贈貞敬夫人 原州全氏와의 사이에서 次男으로 태어나셨습니다. 字는 仲成 號는 孚齋

慶遂公은 일찍이 進士에 합격하시고 一七0五年(肅宗三十一年 乙酉) 增廣試甲科 에 丙科二人으로 급제하셨는데 一七二七年(英祖三年丁未) 增廣試文科에 丙科로 급제하신 아우 諱慶遐公과 함께 兄弟분이 한집안에서 官職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肅宗大王은 政治에 關心이 많았지만 禮論에 치우치고 西人과 南人간의 黨爭이 그칠날이 없어 많은 士類들이 희생되었습니다. 慶遂公도 이 黨爭의 渦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慶遂公은 一七一六年(肅宗四十二年)五月 副提學 柳鳳輝등이 弘文錄을 만들 때 徐命均 李眞望 등 十七人과 함께 선발되고 이어 六月들어 金在魯 李眞望 李明彦 金東弼 李世德 尹聖時 등 二十二人과 함께 都堂錄에 올라 諫官의 길이 열리고 곧 弘文館의 修撰에 임명되셨습니다.

그런데 修撰이 된지 月餘만에 慶遂公은 黨爭의 渦中에 휘말려들었습니다. 바로 이해 七月二十五日 京畿道 忠淸道 全羅道 등 三道儒生 申球 등 六十人이 西人인 尹宣擧의 八十年 전의 일을 내세워 요지 다음과 같은 上疏를 올렸습니다.

『생각하건데 우리 孝宗大王(一六五0~一六五九年)께서 위 아래가 거꾸로 놓일 때를 당하여 크게 有爲할 뜻을 奮發하여 先正臣 宋時烈 등 諸臣을 불러들엿는데 그 한 堂에서 신밀히 經營한 것이 모두 안으로는 政事를 닦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물리치는 計劃과 討伐하여 원수를 갚는 일이었습니다. ...不幸히 “春秋”의 義理를 듣기 싫어 하였고 “春秋”의 義理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宋時烈을 시기하였고 감히 또 孝宗임금께 不滿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대개 일찍이 宋時烈에게 글을 보내어 警戒한다고 핑계하여 句踐이 속였다느니 延廣이 미쳤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로 德을 같이하는 임금과 臣下를 아울러 根據없이 헐뜯었습니다.

또 尹宣擧의 아들 尹拯도 글로 큰 義理를 지키는 일을 헐뜯어 宋時烈에게 박절하게 한 것이 尹宣擧의 뜻과 한결 같았고 尹拯의 무리 崔錫鼎은 尹拯의 祭文을 짓되 빈말을 하고 實行하지 않는 다느니 高尙한 말을 하고 成就한 것이 없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로 宋時烈이 지킨 큰 義理를 근거없이 헐뜯었습니다. 宋時烈이 큰 義理와 誣陷받는 것은 곧 孝宗大王께서 誣陷을 받으신 것입니다.

또 臣들이 近來에 비로소 世上에 刊行된 尹宣擧의 文集을 얻어보았는데... 그 가운데 孝宗께서 丁丑年(一六三七年仁祖十午年)에 江都(江華島)에서 하신 일을 誣陷하여 스스로 自己의 罪를 엄폐하는 餘地로 삼았는데 臣들은 큰 義理를 誣陷한 것도 重大하지만 ...江都의 일을 誣陷한 것은 더욱 重大합니다.』

이 밖에도 尹宣擧의 文集중 여러 대목을 골라 論駁하고 「三司의 臣下는 殿下의 耳目 論思의 책임을 맡았는데 서로 돌아보고 말설여 감히 이 일을 論及하지 못하니 臣은 참으로 개연합니다.」하였습니다.

上疏에 접한 肅宗임금은 尹宣擧가 聖祖를 誣陷한 것이 疏와 같다면 마음 아픈것이 무엇인들 이보다 더 크겠느냐? 文集을 본 뒤에 處分하겠다 하고 文集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또한 申球가 三司를 배척하였다고 하여 持平尹陽來등이 모두 引避하였습니다.

그런데 西人이었던 尹宣擧는 일찍이 인조(一六二三年~一六四九年)때의 사람으로서 宋時烈 등과 經義를 講論한 저명한 儒生이었습니다. 一六三七年(仁祖十五年)에 淸軍이 國境에 集結하여 위협하자 淸將 龍骨大를 斬首하라는 上疏를 올렸지만 이해 十二月에 丙子胡亂이 발생하자 江華島로 피난갔다가 仲父 尹銓과 親友 權長順 金益謙이 모두 戰死하고 그의 처 李氏도 殉節하는 등 간신히 禍를 면했습니다.

이어 南漢山城이 함락되고 仁祖大王이 서울 城東에 있는三田渡에서 降伏했고 그의 아비 尹煌은 斥和論을 편 罪로 유배되었습니다. 이같은 尹宣擧에 대한 上疏에 禮曹參判 吳名峻이 上疏하기를 『故尹宣擧는 丙子年의 變을 겪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自廢하고 自劃하여 이미 世上에 나서지 못하고 忠誠스런 마음이 오직 聖君, 賢輔가 大業을 회복하여 「春秋」의 義理를 펴는 것이었고 마침 孝宗大王께서 한두 巖穴之臣(은둔하여 있는 어진 선지)과 밤낮으로 天下의 큰 義理를 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尹宣擧가 마음에 기꺼이 墨契되어 成業을 남몰래 도울 것을 생각하고 聖君에게 경계를 아뢰려면 반드시 江 都의 일을 引用하여 계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을 뜻을 격발하여야 했고 同志를 劃策하려면 반드시 「春秋」의 義理를 거론하여 周나라를 일으키는 功烈을 勸勉하여야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鄕儒가 들추어내는 밑거리와 주워모으는 根本이 되었을 것입니다.』하고...尹宣擧의 글을 일일이 列擧하여 해명한 다음 「이제 鄕儒들이 황처럼 혀를 巧妙히 놀려 헐뜯어 곧바로 惡逆의 罪를 물려고 합니다. 아! 孝宗을 핍박한다(핍박효종)는 四字는 宋時烈의 지극히 억울한 일이나 이제 尹宣擧를 誣陷한 것은

宋時烈에 견줄 것이 아니니 世道와 人心에 어찌 더욱 해롭지 않겠습니까」하였습니다. 이에 임금이「儒生들의 上疏에 말한 것과 같지 않으므로 내가 이미 가벼이 論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비답하였습니다.

그런데 肅宗임금의 不問批答이 있은 후 八月三日 弘文館 修撰 嚴慶遂公이 儒生申球를 罪주기를 청하는 다음과 같은 上疏를 올렸습니다.

『예전에 賊臣 柳子光이 弔儀祭文을 풀이하여 임금의 마음을 感動시켜 怒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때의 善類(士類)가 다 죽었는데 그때의 禍가 極烈하였으므로 이제까지 傳하는 者는 오히려 氣運이 弱해지고 마음이 두려워집니다. 二百年뒤에 申球 등의 疏가 다시 나왔는데 한결같이 柳子光이 남긴 꾀를 따랐으니 이를 뭇라람의 뜻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多幸히 聖朝께서 위에 계신데에 힘입어 도깨비같은 者들이 그情狀을 숨기지 못하였으나 한 凡常한 임금이 이일을 당하였으면 어찌 戊午年의 어지러운 前轍을 밟지 않으리라고 保障하겠습니까?

臣은 尹宣擧가 참으로 聖上을 誣陷하는 말을 하였다면 尹宣擧를 죄주고 아울러 신구를 징계하여 뒷날의 화를 막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殿下께서 이미 그것이 거짓인줄 아셨으니 신구와 같은 자를 그저 잠자코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臺閣의 臣下도 어찌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여러 날 동안 옆에서 듣고도 죄주기를 청하는 없었으니 臣은 애석하게 여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앞에 말한 弔儀祭文은 朝鮮朝때 世祖가 그 조카인 端宗을 몰아내고 王位를 簒奪한 사실을 諷刺하여 지은 글을 말합니다. 이 글은 朝鮮成宗 때의 學者金宗直이 지었는데 그內容이 項羽가 그 임금 초훼왕을 弑害한 中國의 古事를 비유한 것으로서 후일 金宗直의 門下生인 金馹孫이 史官으로 있을 때 이 글을 史草에 적어 넣었던 것입니다. 본래부터 金宗直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李克敦과 柳字光이 燕山君 때 成宗實錄을 편찬하면서 史草에서 弔儀祭文을 발견하고 이는 端宗을 弔喪하는 동시에 世祖를 陰譏한 것이라 하여 燕山君을 움직여 金宗直을 剖棺斬屍하고 金馹孫을 잡아죽이는 등 많은 젋음 士類들이 희생당한 이른바 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前例를 들어 嚴慶遂公의 上疏가 제출되자 肅宗임금은 비답하기를

「너의 上疏는 대개 분하고 미워하는 데에서 나왔다. 본문 가운데 위 아래의 문맥을 내가 상세히 보았으나 儒疏에 근거한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근거없이 헐뜯었다는 조목으로 망측한 죄를 물을수 있겠는가? 士習(선비의 품습)이 이에 이르렀으니 매우 슬프다」하고 尹宣擧의 文集을 儒生에게 도로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四日 司憲府의 掌令韓永徽 李相成등이 慶遂公에게 배척받았다며 引避하고 또 持平尹陽來 正言黃璿도 引避하였는데 모두 조치하여 다시 出仕케 하였습니다.

한편 八日에는 進士 李弘濟 등 二百人이 申球의 疏를 배척하는 長文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一月二十四日 左議政 金昌集이 上箚하기를 요즈음 鄕儒申球의 疏 때문에 노의가 분분하니 「尹宣擧의 本心은 聖祖를 근거없이 헐뜯는데 있지 않으나 그 외람되고 輕妄한 罪는 이제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죽은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國家에서 論할 만한 것이 못되고 申球같은 怪鬼의 무리가 聖總에 아뢰어 근거없이 辱하고 있다하니 그 말뜻이 聖心에 닿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嚴慶邃는 柳字光을 引用하여 마치 士林의 禍가 곧 일어날 것처럼 말하며 天總을 恐動하고 뭇사람의 입을 脅制하려 하였으니 어찌 그리 남을 誣陷하기에 급급하여 自身이 그말을 답습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까? 經幄사이에도 이러한 수단이 있는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지금 방자하게 譴責하기를 청한 자는 또한 무엄하거니와 저嚴慶邃 등은 장차 士禍가 일어날 것이라는 따위의 말로 恐動하고 脅制하였으므로 臺閣의 臣下들이 망설이고 움츠려서 처음부터 避嫌하는 말이 대개 다흐릿하고 구차하여 거의 義理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臣은 대단히 슬픕니다.」하고 尹宣擧는 論外를 하고 그 망령된 글의 板本을 없애고 朝士, 儒生의 疏는 일체 捧入하지 말것을 주청하였습니다. d에 肅宗임금은 申球를 譴責하기를 청한 疏頭 李弘濟는 泰仁縣에 정배 보내고 修璨嚴慶邃公은 罷職하여 敍用하지 말고 板本은 헐어없애라고 전교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임금의 傳敎에 크게 분개한 世子侍講院의 文學呂必禧가 九月七日 상소하여 左議政 金昌集을 헐뜯어 배척하되 指鹿의 奸邪함과 伏馬의 排斥을 들어서 말하기까지 하고 또 李弘濟 嚴慶邃公 등을 罪준 것이 不當함을 論하고 「喉司(三司)에서 疏章을 봉입하지 아니하여 大臣에게 아첨할줄만 알고 天聽이 가리워지는 것을 돌보지 않으니 臣은 黨與는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임금의 形勢는 위에서 외로와져서 殿下의 國事가 장차 나로 잘못 될 듯 합니다.」하였는데 肅宗임금은 批答하지 않고 特敎하기를

「이 疏의 事緣을 보건대 惡人의 죄목을 주어모아 나라를 근심하고 일을 論해 大臣에게 뜻대로 헐뜯어 욕함이 더하니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럽다... 임금의 形勢니 黨與니 하는 말은 극진히 헐뜯어 辱한 것도 매우 놀랍다. 文學呂必繪를 罷職하여 敍用하지 말라」하였습니다. 그후 正言趙尙絅이 다시 呂必繪의 징계를 요청하니 館職을 삭탈하고 門外黜送하였습니다. 그리고 尹宣擧의 文集板本은 헐라고 忠淸道에 분부하자 大司諫李世勉이 忠淸監營에서 상소하기를

「임금의 전에 없던 過失을 눈으로 보고도 잠자코 말이 없이 오직 奉行하는 것을 公正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職分을 저버리고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하였는데 임금이 遞職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에도 여러 臣下들의 反對上疏가 있었으나 肅宗임금은 板本을 헐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十月十四日 司憲府의 掌令安重弼이 嚴嚴慶邃의 罪를 징계하기를 청하자 肅宗임금은 館職을 削奪하여 門外黜送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일로 하여 慶邃公은 大科及第하고 出仕한지 경우 三個月만에 政爭의 희생이 되고 雄志를 펴보지 못한 채 官道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慶邃公은 讀書와 詩作에 專念하며 再起를 기다렸으나 二年 후인 一七一八年(肅宗四十四年戊戌) 六月六日 逝去하시니 享年四十七歲셨습니다.

「配贈貞夫人廣州李氏는 縣監을 지내신 諱浣公의 따니이시고 贈貞夫人廣州李氏는 諱和徵公의 따님이십니다. 그리고 禮曹判書겸 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내신 長子璹과 長女婿 進士宜寧南泰胤 次女婿大司諫을 지낸 咸平李壽鳳을 남기시고 詩集二이 집안에 전하고 있습니다.

 

* 경하공(慶遐公)

21世孫 慶遐公은 1798年(肅宗四年 戊 )에 禮曹判書를 지내신 諱緝公과 副司勇諱震文公의 따님이신 貞夫人 原州金氏와의 사이에서 나셨습니다. 字는

慶遐公은 洪陽에서 자랐으며 49歲때인 1727년(英祖三 年 丁未)謁聖試 文科에 급제하시고 1729年(英祖五年)7月에 承文院의 正字, 博士를 거쳐 同年7月李宗白, 趙尙慶등 15人과 함께 本館錄에 오르고 1730年(英祖六年)2月 司憲府의 恃平 이 되셨습니다.

1731年(英祖七年)4月에 司諫院의 獻納 으로 자리를 옮기시고 1732年(英祖八年)5月에 副司直이셨습니다. 副司直이 되신 慶遐公은 5月4日 당시 世間에 不公正하다는 不平이 심했던 軍役改革案을 上疏 하였습니다.

朝鮮의 軍役은 兵農一 致의 五衛制때 편성된 것인데 주로 군역을 담당하는 軍事力의 構成要素로 되었습니다. 良役은 身役, 奉足 또는 保로 나뉘우고 身役은 16歲 以上 60歲 이하의 男子가 交代로 軍役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一番上軍은 番上을 마치고 歸鄕하면 番事가 되고 每月一回씩 訓鍊 받았습니다.

또 軍保는 番上하지 않는 良人(平民)은 世祖 때부터 保가 되어 番上한 者의 經費를 조달하기 위한 軍布 를 납부했습니다. 그런데 壬辰倭亂이후부터 農 兵을 分離하여 傭兵制로 바꾸고 給料를 지급했는데 良役은 軍役담당보다는 軍布 를 거두어 國家財政에 充當하는 實情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상과 같이 軍役이 그 本來의 性格이 變質되면서 百姓들간에 不平이 심했던 것입니다. 이를 是正하고 慶遐公은 要旨 다음과 같은 革新的인 改革案을 제출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良役은 실로 一百年이 되도록 救濟하기 어려운 弊端입니다. 戶布, 口錢, 流布, 結布 등에 대한 論議는 결코 그것이 방해가 됨을 알고 있습니다만은 만약 한 匹의 制度를 行하려고 한다면 軍保의 수고스럽고 편암함을 고르게함이 마땅합니다.

대저 고을의 保人은 모두 一年에 1匹의 구실을 負擔하는데 騎兵이나 步兵은 十六個月에 2匹을 바칩니다. 그리고 禁衛營과 御榮廳의 군사는 四年에 한번 上番하는데 또 資保를 支給합니다.

臣은 생각하기를 騎兵과 步兵이 바치는 綿布는 一年에 1匹로 하고 禁衛營과 御榮廳의 軍士는 임시로 輪番을 피하고 壯丁을 뽑아 訓局의 陞戶砲手처럼 長期間 호위하게 하되 番을 들려 나가지 않는 者는 한해에 1匹씩 바치도록 할 것이며 이것도 不足하면 各都 의 田結과 雜役으로 이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삼가 條目으로 別學하여 아룁니다.

一, 서울의 各營과 各司에서의 二匹구실은 一年에 거둬들이는 것이 三十三萬六千九百여 匹인데, 지금 한필의 제도를 시행한다면 이 數字의 軍士가 있은 후라야 이를 감당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병과 보명 그리고 금위영과 어영청 군사의 변통한 綿布를 통제한다 하더라도 부족한 수자는 오히려 三萬七千九百 여 匹이 되며 각도의 防軍 과 水軍 의 軍保는 합쳐서 十二萬九千六百여 名이 되는데, 지금 1匹의 제도를 시행한다면 부족한 것은 군사의 額數만큼 됩니다.

一, 각도의 봉수원군 및 보인은 많고 적음이 일족하지 않으니, 만약 烽火마다 참작해서 五戶로 족한다면 남은 군사가 의당 四萬二千六百여명이 될터이니 각기 면호를 거두어서 부족한 수자에다 옮겨서 보충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一, 각도의 전결과 잡역의 고되고 수월함이 같지 않습니다. 지금 또 참고로 헤아려보면 三南은 一結마다 一兩을 징수하고, 京畿에서는 一結마다 一兩五錢을 징수하며 南西 및 關東, 關北도 역시 三南에 의거하여 一結에 一兩씩 징수하되 그가운데서 특별히 各營邑에 除給하고 대저 닭과 땔나무 등의 잡비는 나머지 부족한 것의 대신으로 옮겨서 채우게 하소서.

一, 禁衛, 御營 두 군영의 군사 十哨의 陞戶한 자는 의당 訓局의 事例와 같이 해마다 사람들에게 각각 九匹의 綿布를 支給하되 이것은 경상비용 밖의 것으로 三南과 海西의 結田 가운데서 미루어 옮기게 하소서.

그리고 禁衛營과 御榮廳에 소속된 海西의 別驍衛 및 別驍隊의 上番은 폐단이 잇으니 우선 번드는 것을 停止하도록 하여 本道의 監營과 兵營에 옮겨서 소속시키고 해마다 試驗에 나아가게 하며 直赴는 別武士의 例와 같이하고 그 保軍은 禁衛營과 御榮廳에서 면포를 거두어 陞戶에게 九匹씩 지급하는 數字에 보충하게 하소서.

一, 각도의 軍摠 및 田結 雜役錢을 전부 모아 廟堂으로 하여금 處理하게 하소서.』

이상과 같은 具體的이고 革新的인 長文의 上疏를 접한 英祖임금은 優渥한 批答을 내리시고 備局으로 하여금 稟處하게 하였습니다. 慶遐公은 열무 후 正三品政大夫로 加資되셨습니다. 그후 1738年(英祖十四年)三月 承政院의 承直에 제수되시고 경연찬관직을 겸무하셨습니다.

慶遐公은 다음해 1739년(英祖十五年)十一月五日 逝去하시니 享年 六十二歲셧습니다. 遺集二卷이 後孫에 전하고 있습니다.

 

* 한중공(漢重公)

21世孫 諱漢重公은 1664年(顯宗5年 甲辰)進士이신 아버님 諱銓公과 司果인 諱揆公의 따님이신 德水李氏와의 사이에서 나셧습니다. 字는 子鼎 號는 龍湖.

漢重公은 1694년(肅宗二十年甲戌)庭試文科에 丙科로 급네하셨습니다. 實錄記錄은 確認할 수 없고 家寶에 依하면 承文院의 正字 博士를 거쳐 三次에 걸친 州郡宰臣과 督郵官을 역임하시고 成均館의 典籍 弘文館의 校理, 敦寧府의 僉正등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런데 1728年(英祖4年 戊申)에 慶尙道亂敵 李麟佐가 密豊君 坦을 추대하고 申天永을 兵使로 權在鳳을 營將으로 삼고 起兵하여 淸州兵使 李鳳祚, 營將 南廷年을 살해한 다음 竹山 安城 居昌 등을 휩쓸었습니다.

이때 領事(敦寧附,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등의 長正一品)로 左營鎭에 부임가던중 風疾이 발생하여 居所 西湖로 歸家하여 치료하다가 1732년(英祖8年壬子)에 逝去하시니 享年89歲셨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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